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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음악의 세계/[음악] 냉혹한 EDM의 역사

[EDM] #04. 디스코 몰락 이후의 첫 세대, 하우스 / 개러지 / 테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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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디스코가 탄생하고 물먹었던(?) 과정,
그리고 그와 무관하게 유럽에서는 디스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까지 지난 글들의 내용이었다.

이번 글은 다시 미국에서 시작한다.
과연, 미국에서 일부 또라이들이 그런 디스코를 싫다고 지롤해 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 오늘의 등장 인물 ]

이번 글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장르의 발전을 훑어볼 수 있으므로,
갑작스럽지만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있었던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The Gallery의 사진을 못구해서 대충 아무 클럽 사진이나 주워옴

뉴욕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 중 하나로 꼽히는 The Gallery라는 곳이 있었다.
이 곳은 1973년, Nicky Siano라는 DJ가 자신의 형과 오픈한 디스코 클럽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코디로 프랭키 너클즈(Frankie Knuckles)를 고용했고,
프랭키 너클즈는 자신의 친구 리 레반(Larray Levan)을 소개한다.
두 사람은 뉴욕 할렘가의 Ball Culture(볼 문화, 대충 흑인들의 언더그라운드 LGBT 문화)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만났던 사이였다.
 
프랭키 너클즈와 래리 레반은 처음부터 디제이 부스에서 활동하지는 않았고,
일하는 중간중간 시아노의 테크닉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혹은 그가 직접 가르쳐주는 내용들을 배웠다고 한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난 후.
프랭키 너클즈와 래리 레반은 Continental Baths라는 게이 클럽에서 디제잉 커리어를 시작했고,
둘의 스타일과 스킬은 언더그라운드 컬쳐에서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 Frankie Knuckles -

프랭키 너클즈. 뒤의 GODFATHER가 보이십니까?

하우스 음악을 설명할 때, 하우스 음악의 대부인 Frankie Knuckles를 빼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프랭키 너클즈의 이름을 빼고 하우스 음악의 탄생과 발전을 논한다면 그냥 무시해도 된다.
아마 이후에 이어질 장르 나치의 엄격한 장르 구분을 제외하면 별 도움도 안 될 것이니.
 
물론 프랭키 너클즈 혼자서 하우스 음악을 만들고 발전시킨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양반은 하우스 음악의 틀을 만들고, 하우스라는 이름을 만들고, 수많은 하위 장르들로 이어질 길을 닦았다.
특히 그 중 하나인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는 결국 영국과 유럽으로 건너가서 EDM의 황금기를 열어버렸고,
그 결과 오늘날 전자 음악의 장르가 이렇게까지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세분화되고
시도 때도 없이 인터넷 곳곳에서 장르 나치들의 blitzkrieg가 발생하게 되었다.
 

- Larry Levan -

디제잉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너무나도 많이들 사용해서 정면샷을 가져왔다.

레반은 코디로 일하는 첫 1년 정도는 디제잉에 별 관심이 없었고, 패션 디자이너를 꿈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74년 4월(이런건 왜 또 구체적이지)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디제잉에 흥미를 보였다.
 
시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탓인지, 레반의 믹스에서는
소울과 R&B등의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장르들의 색채가 짙게 나타나고,
이것이 이후 개러지(Garage)의 특징이 된다.
 
이후, 래리 레반은 당시의 가장 인기 있는 DJ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다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단순히 그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거의 '추앙(worship)'했다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이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Michael Brody는 래리 레반을 처음 본 자리에서
"쟤 내거다. 얘 하나 보고 클럽 열어본다."라며 새로운 클럽을 열었고,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뭐, DJ 스킬 말고도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는 지인들의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재능있는 스윗한 흑인 게이였던 것 같다.


[ 시카고 하우스 / Chicago House ]

<a.k.a>
Early House, Jacking House, Warehouse music, Classic House
 
<Period>
1970년대 후반
최초의 음반 : 1984
 
"Disco's revenge"
"디스코의 반격"
- Frankie Knuckles, 1960, 자신의 음악을 설명하면서 남긴 말
 
하우스 음악(House music)은 매우 방대하며, 오늘날 EDM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들보다 덜 거칠고 덜 공격적이라(뭐...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많이 친숙한 장르이기도 할 것이다.

대충 House

하우스 음악의 House는 여러분이 생각할법한 그런 집이 아니라, Warehouse의 줄임말이다.
양놈들이 집에서 파티할 때 자주 튼다고 하우스가 아니다.

대충 Warehouse

그렇다고 Warehouse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물류 창고같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전설적인 시카고의 Warehouse Nightclub을 말하는 것이다.
미드같은데서 보니까 양놈들이 넓은 창고에서 종종 파티하던데? 여서 웨어하우스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Chicago Warehouse이다.

그리고 나이트 클럽이긴 한데,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본래는 흑인 게이들을 위한 나이트 클럽이었다.
 
"아니 흑인 게이 음악이 싫다고 디스코 폭파의 밤이니 뭐니 사건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뭐... 그건 그랬지.
심지어 그것도 시카고에서 ㄹㅇㅋㅋ
 
래리 레반의 이야기는 밑에서 이어질 것이니,
여기서는 프랭키 너클즈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하우스의 발전 과정을 요약해 보자.

- Warehouse -

1977년, 프랭키 너클즈의 친구가 시카고에 흑인 게이들을 위한 클럽, Warehouse를 열고 그를 초청한다.
이전에 뉴욕에서 활동하던 프랭키 너클즈는 시카고로 이주하였고, 웨어하우스에서 DJ 활동을 시작한다.

프랭키 너클즈는 웨어하우스에서 손에 잡히는 모든 장르들을 플레이하며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펼쳤다.
그는 70년대 신스팝부터 디스코, 하이 에너지, 이탈로 하우스, EBM, 일렉트로, 힙합, 펑크, 록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양한 장르들을 선보였는데, 곧 그의 믹스 세트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사람들은 프랭키 너클즈의 세트를 "Warehouse music", 혹은 줄여서 "House music"이라고 불렀다.

대충 이미지가 들어갈 타이밍

처음에는 흑인 게이만을 회원으로 받아주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찾아오게 된다.
생각해 보면, 디스코도 원래 흑인들이 향유하던 문화를 백인 인싸들이 기웃거리면서 발전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프랭키 너클즈는 당시 시카고의 유명 DJ였던 Ron Hardy와 함께
시카고 하우스의 기틀을 잡은 아티스트로 평가된다.
(Ron Hardy는 Acid House에서 다시 돌아온다)
 

- 새로운 스타일, Chicago House -

한창 인기가 절정에 다다른 1982년, 프랭키 너클즈는 스스로 Powerplant라는 클럽을 연다.
그리고 1983년 그를 찾아온 디트로이트의 젊은 DJ, Derrick May의 소개로 EDM 역사를 바꿔놓을
희대의 개사기 아이템, TR-909 드럼 머신을 도입한다.
(데릭 메이 역시 이 글에 등장한다)

TR-909 드럼 시퀀서는 "이걸 드럼 소리라고 내놓냐?"라는 평가를 받던 TR-808의 후속작이다.

프랭키 너클즈가 이 기계로 한 것은 단순하다 :
 
1. 인기 있는 트랙의 가장 신나는 부분을 자른다.
2. TR-909로 4-to-the-floor 그루브의 드럼 루프를 만든다.
3. 동시에 재생한다.
 
이 방식이 가지는 이점은 단순했다.
기존 인기있는 트랙의 가장 신나는 부분을 잘라 쓰니, 더 이상 사람들은 곡의 하이라이트를 듣기 위해
이전의 지루한 인트로, 벌스, 빌드업, 브레이크 등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 음악은 언제나 드롭이자 훅이자 하이라이트였던 것이다!
(여담으로 그 '자르는' 부분은 reel-to-reel tape를 이용한, 진짜 말 그대로 테이프 자르고 붙이기였다)

특히 TR-909의 클랩(Clap) 소리는 너무나 찰지게 들려서 마치 진짜 사람이 손뼉을 치는 것처럼 들렸는데,
이에 시카고 하우스에는 "Jacking House"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혹시 감이 잘 안 오신다면, 아래 영상에서 스네어/클랩 소리를 잘 들어보시라(쿵짝쿵짝할 때의 '짝').
필자가 추천하는 부분은 21:40부터이다.

실제 프랭키 너클즈의 믹스 셋(이라고 주장되는 것)

그렇게 저렇게 1980년대 중반에 시카고 하우스의 틀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되었고,
때마침(?) 언더그라운드에서 새로운 마약(엑스터시, 흥분제)이 돌기 시작하면서 점점 퍼져나가게 된다.
 

- 최초의 하우스 레코드와 해외로의 진출 -

최초의 하우스 음반은 Jesse Saunders-On and On (1984)이다.
Discogs에 따르면 1983년 만들어져서 이듬해 발매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Jesse Saunders - On and On

 본래는 플로리다 DJ, Mach가 유행하던 디스코 등의 음악들을 짜깁기 해서 만든 메가믹스, On & On 음반을
도둑맞은 Jesse Saunders가 이를 땜빵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만든 게 이 음악이라 한다.
어쩌다 보니 첫 번째 하우스 음악이 음반으로 발매된 것이다.
(거의 1년 전에 본인이 썼던 글에서는 이 내용이 거의 거꾸로 설명되었었다;;)
 
아무튼 이 작품이 꽤 성공하자,
시카고의 다른 프로듀서들이 소위 '하우스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 시카고 하우스는 해외(주로 영국)에 알려지면서 훨씬 널리 퍼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발레아레스에서 행복한 휴가를 보낸 DJ들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시작된 광란의 파티,
레이브(Rave) 열풍이 한창 불고 있던 때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소리(음악)를 원했고,
당연히 바다 건너에서 온 미국 아티스트들에 대한 선호가 굉장히 높았다.
프랭키 너클즈도 1987년에 본인이 운영하던 클럽을 정리하고 영국에서 4개월간 활동한다.
 

- 프랭키 너클즈의 유산 -

프랭키 너클즈는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꾸준히 음향 엔지니어이자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2014년에 성인병과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프랭키 너클즈가 남긴 유산이 워낙에 대단한 덕분에, 그와 관련된 것들이 꽤 많다.
 
1996년에는 시카고 LGBT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고,
(당연히) 그래미 상도 받았고(1997년, Grammy Award for Remixer of the Year, Non-Classical),
예전 웨어하우스가 있던 거리의 이름은 "Frankie Knuckles Way"로 지정되었고,
시카고의 매년 8월 25일은 Frankie Knuckles day로 지정되었고
(당시 일리노이주의 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도와줬다고 한다),
2004년에는 Dance Music Hall of Fame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에는 Dance Music Hall of Fame의 DJ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벽화가 빠지면 섭하다.

- 하위 장르로의 발전 -

하우스 음악은 끝없이 중독적인 '쿵 쿵 쿵 쿵'이 반복되는 음악이었고,
그에 따라 큰 인기를 얻음은 물론이요, 이를 담은 음반에 대한 수요도 굉장히 높아졌다.
 
그러나 하우스 음악을 시장에 풀거나 라디오에서 틀거나 하려면 녹음된 퍼포먼스 곡들을
적당히 '잘라내고 다듬는' 과정이 필요했다(클럽에서 수 십 분간 틀던 세트를 그대로 가져올 순 없으니...).
여기서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추가하였고, 그중 일부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Mr.Fingers - Mystery of Love (1985)딥 하우스(Deep House)의 시초가 되었고,
Phuture (혹은 DJ.Pierre) - Acid Tracks (1987)애시드 하우스(Acid House)의 시초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장르는 영국의 레이브 씬으로까지 건너간다.
 
당시에 유명했던 시카고 하우스 음반을 매주 수입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나가다 보니,
"우리가 못 만들 이유가 뭐지??"라면서 영국 음악가들이 만든 하우스 음악은 UK 하우스(UK House)가 되었고,
"영길리가 만드는데 우리가 못만들 이유 있음??"라며 유럽 음악가들이 만든 것들이 유로 하우스(Euro House)가 되었다.
물론 이게 유럽에서 끝날 이유는 없지. 전 세계 곳곳에서 (대충 지명/문화 이름) House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굳이 이들뿐 아니라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 House는 모두 프랭키 너클즈가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장르들이다.
여기서 이 이상 언급하는것도 웃긴 일이다.

Frankie Knuckles Boiler Room NYC DJ Set / 생전 Boiler Room의 초청으로 공연하는 모습

앞으로 무슨무슨 하우스를 보게 된다면 프랭키 너클즈를 기억하십시오.


[ 뉴욕 개러지 / NYC Garage ]

<a.k.a>
Garage, Garage House, New York house
 
<Period>
1970년대 후반
 
 
개러지(Garage)는 차고라는 뜻이다.
따라서 Garage Music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차고 음악'이다.

대충 미국 가정마다 존재하는 차고의 상상도

뉴욕의 교외에 위치한 어느 작은 집.
물론, 작은 집이라지만 우리나라처럼 10평대 그런 곳이 아니라,
보통은 마당도 딸려있고 작은 창고 겸 차고도 있고 개집도 있고 그런 곳이 아메리카 아니겠는가?
 
한 남자가 주말에 음악을 들으면서 망가진 가구를 수리하고 있었는데,
빵빵한 음악에 온갖 잡다한 기계 소음들이 섞여 들어간 게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래서 당시에는 비교적 저렴하게 풀려있던 녹음기로 음악과 소음 소리를 동시에 녹음했는데
어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데? 왜지
 
그래서 이웃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던 도중에 한 번 들려줬는데
어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은데? 왜지
 
마침 뉴욕의 음반 회사에서 일하던 양반이 이 음악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상사에게 녹음된 테이프를 들고 갔는데?
과장님 마음에 들고 부장님 마음에 들고 부사장님 마음에 들고 사장님 마음에 들고
이사장님 마음에 들고 전무님 마음에 들고 회장님 마음에 드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Paradise Garage -

위의 래리 레반을 다시 불러오자.

위에서, Michael Brody라는 양반이 래리 레반을 처음 본 자리에서 
"쟤 내 거다. 얘 하나 보고 클럽 열어본다."라며 클럽을 열었다고 했는데, 진짜 열었다.
사실상 래리 레반만을 위해 열어준 클럽에 가까웠는데, 그곳이 바로 전설적인 Paradise Garage이다.
Garage라는 이름의 유래이자, 래리 레반이 1977~1987년까지 10년간 전속 DJ로 활동하던 클럽이다.
 
물론 여기도 게이 클럽이었고, 마약과 성병이 돌던 무시무시하던 공간이었다.
여담으로 Brody는 1987년, 자신이 죽기 2주 전에 패러다이스 개러지 클럽의 문을 닫았고,
래리 레반은 주변 친구들을 약물중독/성병 등으로 잃으면서 더욱 심각한 약물 중독에 빠졌다.
그로부터 5년 후, 일본 투어 중에 다친 상처 때문인지 심각하게 병을 앓다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Larry Levan Live @ Gold, Tokyo (September 1992) [The Harmony Tour]

뭐... 비록 그렇게 젊은 나이에 갔지만, 래리 레반도 프랭키 너클즈 못지않게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가 플레이하고 리믹스했던 세트들의 느낌을 계승한 장르가 바로 여기서 소개할 개러지(Garage)이고,
그가 상주하던 패러다이스 나이트클럽은 현대 클럽의 프로토타입으로 여겨지며,
그의 DJ 스킬과 파티의 주도 능력은 오늘날 DJ들이 갖춰야 할 표준 덕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까, DJ로서는 최고의 찬사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리스펙.
 

- 뉴욕의 새로운 음악, NYC Garage -

위의 하우스가 프랭키 너클즈의 스타일대로 여러 장르의 음악들을 리믹스한 것이라면,
개러지는 래리 레반의 (주로 패러다이스 나이트클럽에서) 플레이 세트였다.
사실, 초기에는 그의 세트를 "Saturday Mass"라고 불렀지, 개러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개러지라는 이름은 시간이 더 지난 후, 그의 플레이 세트와 유사한 성질의 곡들을 스튜디오에서 만들면서 붙은 이름이다.

Larry Levan - Live At The Paradise Garage [1979]

동시대의 시카고 하우스와 비슷한 배경에서 탄생했기에, 사실 둘이 유의미하게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두 장르를 구분하려면 약간의 성급한 일반화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엄격하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비교를 해볼 수 있다.
 

1. 가사

초기의 시카고 하우스는 주로 인기 있는 특정 부분을 취해서 돌려썼기에, 
주로 짧고 무작위적인 보컬 챈트(chant)가 튀어나온다.
그에 비해, 개러지는 상업적인 곡들처럼 긴 가사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즉, 시카고 하우스가 "I Love you" 정도의 짧은 문장이나 단어가 반복된다면,
개러지는 "우리의 만남과 이별과 그 바래진 기억들을 내가 추억한다면 힘차게 나아가겠다"를
상당히 길고 시적인 가사로 나타낸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물론 이는 이후 하우스 음악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면서 점차 사라진 특색이 되었다.
당장 요즘 시대에 유행했던 여러 하우스 하위 장르들을 보면 가사를 가진 경우가 많아졌으니까.
 

2. 곡의 분위기

시카고 하우스가 보다 신나는 클럽 음악이라면,
개러지 역시 클럽 음악이기는 하지만 보다 소울풀(Soulful)하고, 재즈 같다.
 
마치 롤과 히오스를 비교하는 느낌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
분식집 음악과 고오급 레스토랑 음악...
 

- 개러지의 유산 -

개러지는 참 아이러니한 장르이다.
왜냐하면, 보통 Garage Music을 검색하면 UK Garage Scene이 더 많이 검색되기 때문이다.
사실 가면 갈수록 개러지와 UK 개러지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나 싶어지긴 하지만?
개러지를 마무리 지으면서, 개러지가 이후 영국에서 어떻게 UK 당하는지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충 정글

1992~3년 무렵, 당시 영국의 레이브 씬은, 오늘날 드럼 앤 베이스의 전신인 정글(Jungle)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글은 父 : Breakbeat Hardcore / 母 : Amen Break라는 환상적인 혈통을 물려받았던지라,
조금은 점잖고 편하게 놀고 싶었던 레이디들에게는 별로 안 맞는, 굉장히 폭력적인 장르였다.
마치 와인보다는 보드카 같은 장르랄까. 뭔 느낌인지 감이 오시나요??
 
이에 여성 고객들이 클럽에 덜 오게 되면서(= 사실 여성이 안 오면 남성도 안 온다)
수익 감소를 우려하던 클럽 오우너들은 뭔가 새로운 장르를 물색하게 된다.
뉴욕에서 나오는... 고오급 레스토랑...

아니 내가 하던 CBT때까지는 괜찮았다니까? // 네네 어르신, 얼른 식사 하셔야죠

하지만 정글/DnB와 같이 스까트는걸 못 참았던 일부 DJ들의 노력(?)으로,
곧 원래의 개러지에 속도를 높인 스피드 개러지(Speed Garage)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딱 여기까지가 "그래도 개러지다"라고 우길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여기서 보다 공격적인 느낌과 어두운 느낌을 중요시하던 아티스트들은 다크 개러지(Dark Garage)로,
4-to-the-floor 킥을 포기하고 브레이크 비트와 베이스 라인을 강조한 아티스트들은
2 스텝 개러지(2-step Garage)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PC의 보급과 FL 스튜디오의 전파, 그리고 가난했던 영국의 흑인 래퍼들이 중심이 된 UK 힙합씬이 맞물려서
그라임(Grime)이 탄생하였고,
이상의 모든 것들의 총합으로 그렇게 우리가 잘 아는 덥스텝(Dubstep)이 탄생하였다.
사실은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는 그 덥스텝은 아니지만.

대충 덥스텝 베이스의 주파수 분석. '베이스'지만 베이스 영역대가 제일 부실하다 ㄹㅇㅋㅋ

여기서 스크릴렉스까지 살포시 얹어주어야, 비로소 여러분이 생각하는 덥스텝이 완성된다.
US 스타일의 덥스텝, 즉 브로스텝(Brostep)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에서는,
도대체 브로스텝 외로 왜 이런 이름들이 등장해야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많은 하위장르들이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OOO step 및 OOO Bass들이) 등장하였다.

대충 덥스텝 하위 장르들의 리스트

멜로딕 한 코드 진행이 두드러지는 멜로딕 덥스텝(Melodic Dubstep)

베이스 그 자체가 리듬까지 주도하는 리딤, 혹은 컬러 베이스 (Riddim / Colour Bass)

드럼 앤 베이스와 결합한 드럼 스텝 (Drumstep)

메탈 음악과 결합한 메탈 스텝 (Metalstep)

그냥 말 자체로 vomit 하는듯한 느낌의 보밋 스텝(Vomitstep)

극단적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데스스텝(Deathstep)과 티어스텝(Tearstep)

100~110 bpm대의 펑키한 글리치합(Glitchhop)

일본에서 발전한 카와이 베이스(Kawaii Bass)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사운드가 샘플링된 애니스텝(Animestep)

(특히 그중에서도 로리 캐릭터의 사운드가 샘플링된 로리스텝(Lolistep))

왜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칠 아웃되는 칠 스텝(Chillstep)

트랩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던 트랩스탭(Trapstep)

냉혹한 로봇과도 같은 로보스텝(Robostep)

진짜 이건 뭔가 싶은 서브스텝(Substep)

여기에 동시대 다른 장르들의 멜로딕/감성을 끌어와 시장성을 노린 퓨처베이스(Futurebass)까지 지나고 난 후에야,
인류 멸망 이후의 소리를 담은 퓨처 개러지(Future Garage)까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왜 이런 멸망전을 펼치며 살아왔나 현타라도 왔음이 분명하다.

Future Garage를 한 장으로 표시하면 딱 이 사진이다. 한 때는 시끄러운 도시였지만, 지금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다는 소리.

사실 이쯤 되면 래리 레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지ㄹ하지마 씹새야"라고 할 소리긴 하지만,
뭐...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이 모든 걸 UK 당했다고 표현한다.


[ 디트로이트 테크노 / Detroit Techno ]

<a.k.a>
Early Techno, Classic Techno, 
 
<Period>
1984~
 
'디트로이트(Detroit)'라고 한다면??
아마 굉장히 불안한 치안 상태.
기계에 모든걸 빼앗겨 경제적으로 몰락한 도시.
어쩌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잠시 슬픈 이야기이다.
이 부분은 디트로이트 역사를 다룬 위키 문서의 40%에 해당하는,
도시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동안 군수 물자를 만들어 납품하면서, 디트로이트는 급속도로 커져나갔다.
일자리가 생기자 사람들이 몰렸고, 공장은 다소 임금을 덜 주고 부려먹을 수 있었던 흑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린다는 점은, 다시 말해 치안, 위생, 주거 등의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1929년의 디트로이트 전경. 저 당시의 미국을 보면, 지구라는 맵도 방장 사기맵이 아니었을까?

흑인 노동자들은 다른 지역에서보다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백인들에 의해 배척받았다.
그들은 일자리가 도시 곳곳에 흩어져있음에도 도시 중심부의 특정 지역에 몰려살 수 밖에 없었다.
1950년대, 당시 자동차 산업의 빅 3였던 General Motors, Ford, Chrysler가 공장들을 디트로이트의 중심부에서
점점 외곽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나, 
당시 흑인들에 대한 레드라이닝(Redlining)은 흑인들이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 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까지 발생하자,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한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의 해외 자동차 업계에게 크게 위협받는다.
크라이슬러는 사실상 그로기 상태에 빠지고, 제너럴 모터스와 포드는 보다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생산 단지를 옮겨버린다.
게다가 제조업이 점차 기계화/자동화 되어가면서 얼마 남지 않았던 일자리마저 사라졌고, 
도시는 산업의 다양화를 꾀하지도 못하고 몰락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한 순간에 훅 하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마치 끓는 물 속의 개구리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아마 이 시기는 "슬슬 따뜻해지는데? -> 슬슬 더운데? -> 어 잠만 뭐지? -> 아 잠시만요" 에서
"어 잠만 뭐지?" 정도의 시기로 볼 수 있겠다.
 
동쪽에서는 소련이라는 뭔가 불안한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지만? 암튼 그건 모르겠고?
당시 미국의 시민들은 만연한 과소비에 현타를 느낄 정도로 돈이 돌던 국가였다.
(그리고 이 과소비에 현타를 느낀 여피족들로부터 시작된 문화가 New-Age이다)
디트로이트 역시 최전성기는 아닐지언정, 잘 살았으면 잘 살았지 못살던 동네는 아니었다.

대충 디트로이트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의 상상도를 구현한 이미지

특히 이 지역에 살던 중산층의 흑인들이 그래도 여유롭게 살았다.
어느 정도나 여유가 있었냐면...
 
당시 해외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이나 미국 할렘가의 래퍼들이 돈이 없어서 음악 장비를 훔치고,
자체적인 레이블을 세워서 음반을 팔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배고팠던 시절에,
디트로이트의 중산층에 해당하는 흑인들은 매일같이 구O나 아르X니 시계를 차고 클럽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타적인 회원제 클럽들을 전전하며, 70년대 중후반의 최신 트렌드,
그러니까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하이 에너지, 일렉트로 디스코, 이탈로 디스코, 신스팝 등을 즐기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디스코는 대충 이런 장르였다.

당연히 젊은 세대에서는 유럽의 음악을 모방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고,
보통은 자동차 산업의 수혜자였던 부모들의 재력을 등에 업고 온갖 장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아마 시카고나 뉴욕에서 한 푼 두 푼 모아서 길거리나 전전하던 래퍼들이 보면
인생 치트키 쓰고 산다면서 온갖 자본주의적인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어차피 얘네들도 20년도 안가서 평등하게 가난해지는바람에 의도치 않게 밸런스 패치가 된다.
 
아무튼 그렇게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디트로이트에서 여러 음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영향을 준 장르는 위의 유로 디스코들과 그 파생형들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도대체 왜이렇게 냉혹한 기계같은 음악들만 나오는 것이지?

RHYTHIM IS RHYTHIM - strings of life (1987)

분명 들어보면 현악기(strings, 스트링스)나 피아노가 나온다.
하지만 이런 아날로그한 악기들조차 저렇게 뻣뻣하게 묘사된다고?
혹시 인간이나 어쿠스틱에 불만이라도 있어요?
뭔가 로봇이 인간을 따라하려하는듯한, 불쾌함마저 느껴진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이 뿐만 아니라, 그냥 당시에 나오던 디트로이트의 음악들이 대부분 저랬다.
냉혹하고... 뻣뻣하고... 사람의 온기는 존재하지 않는....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던지, 우선 인간적인것들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SF 영화의 사이보그같은걸 보면, 인간 모습을 하지만 인간같지는 않은 그런 느낌?

아마 Chat GPT한테 노래 불러줘 하면 나오는 그런 느낌이려나?

만약 여러분이 기존 EDM의 "인트로-벌스-빌드업-드롭" 머시기 하는 구조에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바로 테크노 음악을 처방받을 시간이다.
바로 텐션이 심박수 0을 향해 달려갈테니까.
운명하셨습니다.
 
한 때는 자동차 산업 단 하나만으로 미국의 손꼽히는 대도시로 번성하던 디트로이트.
본래는 사람으로 북적이던 도시는 기계와 로봇에게 일자리와 영혼까지 빼앗긴 냉혹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런 냉혹한 디트로이트의 현실을 시시각각 목격했던 세대였기에 음악마저 인간의 온기를 잃어버린 것일까?
근데 생각해보면 얘들도 뮤지션을 고용하는 대신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을 사용한건 똑같았다.
냉혹한 디트로이트의 세계에선 그럴 수도 있지 뭐.

대충 삭막한 도시 풍경

원론적인 소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발전 과정을 보자.

- The First Wave -

디트로이트 테크노, 나아가 테크노의 발전은 두 번의 물결로 설명한다.
(아마 '테크노'라는 이름이 엘빈 토플러의 저서, "제 3 물결 (The Third Wave)"에서 유래되었기에 그런 것 같다)
 
그 중 첫 번째 물결인 "The First Wave"는 테크노의 탄생 과정이다.
시카고 하우스에 프랭키 너클즈가, 뉴욕 개러지에 래리 레반이 있었다면
테크노의 발전을 말하는데 벨빌 트리오(Belleville Three)를 빼고 설명할 수가 없다.

Belleville Three

후안 앳킨스(Juan Atkins), 데릭 메이(Derrick May, 위 RHYTHIM IS RHYTHIM의 Mayday와 동일인이다),
케빈 선더슨(Kevin Saunderson)는 벨빌 고등학교의 동창 사이였다.
 
앗, 데릭 메이는 위에서 잠시 나왔던 이름 같다!
벨빌 트리오는 소위 '하우스 음악'이라 불리는 새로운 음악 씬을 조사하기 위해 종종 시카고를 방문하고는 했는데,
그 곳에서 인기 DJ였던 론 하디나 프랭키 너클즈와 교류하기도 했었다.
 
트리오는 디스코가 자연스럽게 발전한 형태인 하우스에, 마치 kraftwerk처럼 전자음을 묵직하게 얹을 생각을 한다.
아마 이런 아이디어는 그들이 학창시절부터 듣던 "The Electrifying Mojo"라는,
당시 디트로이트에서 유럽의 음악들을 (매니악하게) 틀어주던 라디오 DJ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방송에 대한 내용은 이 글의 하단부에 따로 달아놓겠다)
 
벨빌 트리오는 1981년부터 그 이름을 달고 여러 곡들을 내기 시작했으나,
이내 음악성의 방향의 차이로 각자 독립적인 팀과 레이블을 꾸려 활동한다.
 
이들 중, 후안 앳킨스는 대학 동기와  Cybotron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1984년 "Techno city"라는 곡을 릴리즈한다.
그렇다. 제 3 물결에 등장하는 그 테크노를 처음으로 쓴 단어이고,
후에 나오겠지만 이 음악의 제목으로부터 테크노라는 이름이 붙었다.

CYBOTRON - Techno city (1984)

우우~~ 테크노 시티~~~
그들의 음악은 (당연히 인간의 온기는 없지만) 디트로이트에서 생각보다 잘 팔렸다.
 
그렇게 완전히 색다르고 인간의 온기를 배제한 디트로이트산 기계 음악들은 곧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유럽과 남미에 이어서 아시아 등지의 전 세계로 대유행을 치며
우리가 잘 아는 "테크노 임팩트(Techno Impact)"를 세계에 불러일으키며
음악 세계에 엄청난 충격과 새로운 열풍을 불고와서 기존의 음악 지형을 뒤바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이름조차 없는,
그저 디트로이트에서 나오는 그냥 냉혹한 음악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음악들은 어떤 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1988년 영국에서 정말 뜬금없게도 성공한다.
 
그렇다.
또 영국이다.
 

- The Second Wave -

80년대 후반의 영국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이 당시 영국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광란의 파티(Rave)'가 폭발하고 있던 당시였다.
사람들은 지하실, 창고, 거대한 농장을 하나씩 불법 점거해서 밤 새도록 술 마시고 음악 틀고 마약하고 
세k스 하고, 아무튼 청소년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기에 부적절한 온갖 짓들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경찰이 단속을 안한건 아니었지만,
경찰이 떠봤자 알빠노? 시전하며 옆 건물로 튀어서 파티를 이어가는 미친년놈들을 막을 수단이 없었다.
(정확히는 일부 법안들이 개정되고 수정되고 통합되고 그런 노력은 있었다. 의미가 없었을 뿐이지.)
 
아무튼 레이브에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온갖 곡들을 밤새도록 틀어대고는 했는데,
당연히 80년대에 후반에 유행하던 언더그라운드 장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뭔가 취한 것 처럼 이상하게 보인다구요? 그게 맞아요

그러던 1987년 즈음,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라는 시카고발 신문물이 영국 본토에 상륙한다.
이 장르, 정확히는 애시드(Acid)가 너무나 히트를 치는 바람에 온갖 장르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했으나,
마약만큼이나 내성이 생겼던 탓인지 사람들은 점점 새로운 음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거...

새로운 거 가져와!!

 
그래서 DJ들은 발품을 팔아 이곳저곳을 누비며
신대륙을 발견하려는 콜럼버스마냥 새로운 장르들을 사냥하러 나서고는 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가 디트로이트의 참신한 음악을 발견한다.
 
아니 이게 무엇이지??

우우~ 테크노 시티~~

그렇게 1988년, 영국의 음반사 Kool kat Records는 벨빌 트리오 등을 통해 컴필레이션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이 영길리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해버렸는데,
컴필레이션의 초기 이름을 감히 「The House Sound of Detroit」라고 명명해버린 것이었다.
 
이 새로운 음악에 House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벨빌 트리오는 여기에 반대표를 던졌다.
대신, 앳킨스의 Techno music을 컴필레이션에 수록하면서, 이 장르에 정말로 잘 맞는 이름을 찾아낸다.

Juan Atkins - Techno music

Tech- no- musik-

 
그렇게, 이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컴필레이션은 "Techno! The New Dance Sound of Detroit"라는 이름으로 발매된다.
 
신난다!
드디어 이 음악들을 '테크노'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 장르의 영향 -

그렇게 '테크노'라는 이름을 단 디트로이트발 새로운 신물물도 영국에 안전하게 착륙한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뜨거운 관심에 제대로 착륙조차 하지 못했다.
 
테크노는 1989년,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의 레이브 씬을 직격한다.
사람들은 이 음악에 환장했고, 아티스트들과 마케터들은 이 씬에서 거대한 돈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우선, 영국으로 건너간 테크노는 하우스와 대충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UK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못만들 이유가 있나??"면서 만든 영국식 테크노(Bleep Techno),
"영국애들도 만드는데 우리가 못만들 이유가 있나??"면서 만들어진 유럽 각국의 테크노(Euro Techno).
뭐 애시드 그거 유명하다던데 한번 얹어보자는 마인드에서 시작된 애시드 테크노(Acid Techno).
 
그리고 유럽에서 소위 'UK 당한' 테크노를 보고 "저딴건 테크노의 미학이 아닌데"라는듯이
디트로이트 테크노를 온전히 계승한 미니멀 테크노(Minimal Techno),
거기서 보다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mr과 비슷함)에 가까워진 덥 테크노(Dub Techno)가 등장하였다.
 
물론 테크노의 본고장, 디트로이트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그딴거 알 바 아닌 레이브 씬에서는 보다 매니악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80년대 후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개버(Gabber)와 그 문화를 시작으로,
대충 당시의 모든 인기있는 장르들의 짬뽕이었던 브레이크비트 하드코어(Breakbeat Hardcore)
마치 술 마시고 다음 날 몰려오는 숙취에 현타라도 왔다는 느낌으로 2년만에 여러 장르들로 쪼개어진다.
오늘날에도 EDM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
힝힝 왜 다들 무섭게 놀아 우리 행복해지자면서 만들어진 해피 하드코어(Happy Hardcore),
영국 애들 이거 보고 또 못참죠? 바로 UK시켜버린 UK 하드코어 (UK Hardcore, 근데 결과물이 꽤 잘나왔다),
그리고 하드코어로부터 파생되어 2010년대를 강타했던 하드스타일(Hardstyle),
스마트폰 이후의 리듬 게임에서 많이 사용되는 스피드 코어(Speedcore)에 이르기까지.
아무튼 오늘날에는 주류 장르부터 언더그라운드까지 모두 통트는, 거대한 하드코어 씬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장르가 성공하면서 발생했던 다른 문제는,
이 장르에서 성공 가능성을 본 마케터들이 온갖 음악들에 테크노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냥 대충 쿵쿵쿵쿵이 중심이 되고 전자 악기가 많이 사용된 곡들은 그냥 테크노였다.
그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져, EDM 씬이 과거에 비해 많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자 음악이나 EDM을 무조건 '테크노'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부른다고 무슨무슨 법에 반하여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하는 말이 맞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
제발 구분 하자.


The Electrifying Mojo본명은 Charles Johnson이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라디오 DJ로 활동했는데, 당시의 전자 음악 그룹들의 곡들을 장르를 불문하고 폭넓게 다루었다.
여기에는 Kraftwerk, Prince, The B-52's는 물론,
이후에는 벨빌 트리오를 비롯한 테크노 아티스트들의 곡까지 다루었다.
 
 그의 방송의 특징이라면, 보통 레코드 판에서 몇몇 곡만을 뽑아서 틀거나 중요한 곡들만 틀던 다른 방송들과는 달리,
그냥 음반 전체를 '통으로' 틀거나 심지어 B-side의 인스트루멘탈 버전까지 아무런 편집 없이 틀어버리고는 했다.
이는 그룹 내에서도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곡들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벨빌 트리오나 디트로이트의 2세대 테크노 아티스트들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인정하였다.


참고한 자료들)
 
Frankie Knuckles (Wiki)
Chicago House (Wiki)
Warehouse(Wiki)
Frankie Knuckles 'invents' house music
Larry Levan (Wiki)
[EDM] #03. 뉴욕 개러지 하우스 / New york Garage House (1980~)
[번역] Ishkur의 EDM 가이드 - Garage (개러지)
[The Gardian] 'He was like the Messiah': Larry Levan, the DJ who changed dance music forever
[The Gurdian] Frankie Knuckles: godfather of house music, priest of the dancefloor
The beginner's guide to: garage music
The Belleville Three and The Creation of Tech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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