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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음악의 세계/[음악] 냉혹한 EDM의 역사

[EDM] #02. 디스코의 등장과 그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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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최초의 디스코(Disco)는 그다지 전자적이지 않았다.
드럼, 보컬, 기타, 관/현악기 모두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전통적인 재즈나 스윙과 다를 바가 없었던 장르였다.
따라서 전자 음악의 역사를 논하는데 디스코가 왜 뜬금없이 나오는지 물음표가 붙을 수 있으나,
사실 디스코를 빼면 미국 → 유럽 → 전 세계로 퍼진 EDM의 역사를 설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디스코의 등장과 몰락에 대해 다루어보자.
여담으로 [ ]가 붙어있다고 해서 모두 장르는 아니다.
장르로 구분되는 경우에는 씬에 맞게 색을 입히고 있다.


디스코(Disco)는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등장한 프랑스어 "discothèque"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discotheque(디스코테크)는 library of phonograph records,
"포노그래프 음반들을 틀어주는 곳"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디스코테크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주점이나 클럽은 있었고,
보통은 재즈, 스윙, 록 등의 음악을 밴드가 연주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서로 다른 이유로 한동안 자유로운 음악 활동이 억압받던 시기가 있었다.


[ 디스코테크 / Discothèque ]

<a.k.a>
Discotheque, Discoteque, Discotech, Discotek, music club,
disco club, club
 
<Period>
1960년대 후반~ 

- 유럽 -

맥주집에서 폭동을 일으킨 퓌러(Führer)께서 정권을 차지하고 게르만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아리아인의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지 아니한 흑인이나 유태인이나 기타 이민자 찌끄레기들의 음악이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났다.
 
사실 이전부터 흑인들의 문화였던 재즈나 스윙 등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백인이 존재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총독의 직위를 달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후로, 나치의 영향권 안에 든 국가에서는
독일 외의 문화가 보다 노골적이고 합법적으로 핍박받았다.
 
예를 들자면, 낙지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는 재즈 밴드의 라이브가 금지되었다.
애시당초 비(非) 아리아인의, 게다가 적국의 문화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불경스러웠을뿐더러,
재즈 밴드들이 자랑스러운 blitzkrieg에 참여했던 독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목적의 군악대 등으로
징집당해서 애초에 그걸 연주할 사람들조차 별로 없었다.

대충 미군

이런 낙지는 연합군이 박살 냈으니 안심하라구!
 
뭐 그건 그거고.
아무튼 이 무렵부터 디스코테크가 유럽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다.
 

- 미국 -

"내가 술을 파니까, 그걸 '밀주'라고 부르더군."
"그런데 내 후원자들이 그걸 쇼어 드라이브 호(Lake Shore Drive)에서 그걸 받아 마시더니, '접대'라고 하더군."
- Al capone, 미국의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미국에도 당연히 1900년대 이전부터 클럽이나 주점이나 아무튼 술을 팔면서 노래가 나오는 공간은 있었다.
클럽들은 보통 빅 밴드(Big band, 재즈나 스윙스, 블루스 등을 연주하기 위한 소규모~대규모 관현악단)를 유지하며,
누가 더 퀄리티 높은 밴드와 음악과 술을 제공하는지로 경쟁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 행태(?)에 심각한 제동이 걸리게 되니, 그 유명한 "금주법(Prohibittion)"이 10년 넘게 시행된 것이다.

금주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술통을 깨부수고 있다. 이거 한국에서도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답시고 뭐만하면 돈들여서 기껏 만든거 부수고 난리치던데, 이런 관습은 좀 없애야한다.

이 배경에는 조금 이상한 (사실 심각한) 이유가 있긴 했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여러 이유들이 맞물려, 물이나 음료보다 증류주가 더 싸게 공급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전 국민이 얼마나 술을 퍼마셨던지 이게 국가 경제에 위협이 될 정도였던지라,
국가 차원에서 "술 좀 그만 쳐마시게 해라;;"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당연히 술을 만들고 파는 것뿐만 아니라, 술을 팔던 주점과 클럽까지 단속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술 마시지 말고 놀지 말라고 해서 사람들이 안 그러던가?
마피아들은 몰래 밀주를 팔아서 오히려 더 큰 이윤을 남겼고,
여전히 놀 사람들은 은밀히 술도 마시고 마약도 하면서 놀았다.
 
하지만 당시에 불법적으로 운영되던 클럽들은 밴드를 고용할 깡도 돈도 없었는데,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주크 박스(Juke Box)"였다.

다시는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그리고 내 주크박스도 당장 고쳐 놓고!

주크 박스를 사용하는 클럽에서는 굳이 실제 밴드를 부를 필요 없이,
단순히 그들이 연주했던 곡을 담고 있는 음반만 있으면 음악을 틀 수 있었다.
더더군다나, (몰래) 술 마실 손님들을 받을 자리도 부족한 마당에 드럼이니 기타니 마이크니 그런 걸 둘 공간이 어디 있어?
그냥 기계 하나에서 모든 걸 해결하면 술쟁이까지 더 받을 수 있으니 일석 이조였던 셈이다.
 
물론, 금주령은 오래가지 못했다(1933년 2월에 해제된다).
아니 세상에 누가 술을 금지한다는데 멀쩡히 살 수 있어??
당장 필자부터 글이 잘 안 써진다는 이유로 술 마시고 해당 글을 쓰고 있는 마당에,
인생의 온갖 억까와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씻어낼 수 있는 알코올 혼합물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 글의 초고를 쓰고 7일도 안되서 소주값 6천원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금주령이 끝나자마자 나이트클럽을 곧바로 부활해서,
곧바로 턴테이블과 DJ를 데려와서 당시의 음악들을 짬뽕시켜서 하우스 음악을 만들거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럼 그렇지.
클럽들은 다시 예전의 빅 밴드 메타로 되돌아간다.


[ 디스코 / Disco ]

<a.k.a>
D.I.S.C.O
 
<Period>
1960년대 후반~ 
 
시간이 지나 1960년대 후반.
유럽에서는 디스코테크가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라이브 밴드가 클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재즈나 블루스뿐 아니라 로큰롤(Rock 'n' Roll)이 록 문화를 비롯한 음악 씬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큰롤은 어디까지나 주류 장르, 즉 소수 집단은 소외시키는 장르였다.
 
당연히 주류였던 백인 남성들은 자신과 다른 소수 집단을 좋게 끼워줄 생각이 없었고,
이들은 백인들이 장악한 미국 클럽씬을 벗어나 미국에 알음알음 존재하던 디스코테크로 떠밀리게 된다.
그리고 이 '디스코테크'를 미국에서 짧게 부르는 용어가 바로 Disco였던 것이다.

초기 디스코의 상상도와 비슷한 현실을 포착한 사실

그렇다. 소위 '인싸' 말고는 전부 디스코로 몰렸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힘 있는 주류(Mainstream)였던 백인 남성들의 문화였던 로큰롤에 섞이지 못한,
소위 '아웃사이더(Outsider)'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근데 막상 나열해 보자면, 이 아웃사이더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프리카계/라틴계, 게이, 레즈비언, 아시아나 남미에서 이민온 사람들, 유대인 등등...
 
다양한 배경에서 모여든 아싸들은 디스코테크를 안식처로 여겼고, 여기에서 자신들을 솔직과감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문화와 문화가 섞일 때, 새롭고 독창적인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 사례에서는 그 '독창적인 문화' 중 하나로 '디스코'라는 음악이 탄생했을 뿐이다.
 
초입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디스코 자체는 처음부터 전자적이진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디사이저들이 포함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디스코의 영향을 받은 장르들이 오늘날 EDM씬을 지배중일뿐이지.
따라서 여기서는 구구절절하게 디스코의 음악적 특징을 열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디스코 음악은 생산되고 있으며,
근래 들어 가장 히트 친 디스코 곡을 뽑으라면...

BTS - Dynamite

(사실 디스코보다는 디스코 하우스가 맞는 것 같지만)
 
위의 곡에서 "그루브 있는 베이스 라인", "리듬감 있는 기타", "브라스(관악기)"가 들리는가?
대충 디스코의 특징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특징 중에서 일렉트로닉 뮤직과 관련 있는 점이라면,
디스코의 그 악명 높은 4-to-the-floor 킥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나머지는 보통 곡 자체를 샘플링한 경우가 많으므로, 디스코 자체보다는 개별 곡이 더 중요하다. chic - good times라던지)
 

4-on-the-floor 드럼 비트


[ 디스코 폭파의 밤 / Disco Demolition Night ]

<a.k.a>
Anti-disco, Disco sucks!, Racism, riots of complexed idiots,
Why the hell everyone hiding their true feelings even they loves black-gay artists?
 
<Period>
1979년 7월 12일, 시카고의 코미스키 야구장
 
 
"오늘날 Disco Demolition Night는 가장 안 좋았던 프로모션으로 꼽히지만,
지난 30년간 우리가 계속 기억하는 것을 보면 가장 성공한 프로모션이기도 하다."
- 야구 평론가, Jeremiah Graves
 

- 디스코의 흥행 - 

디스코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필라델피아/뉴욕 등의 클럽에서
록 음악에 대한 반대 문화(Counter culture)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그냥 아싸 찐따들이 그냥 지들끼리 노는 줄 알았는데?
살펴보니 스피커랑 마이크도 구비하고, 나름 지들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 같다;;
이는 Public Address System (PA System)이라고도 하는데,
음악을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오늘날의 파티에서처럼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해서  빵빵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주 그냥 빵빵 터뜨리고 있어요!

여담으로, PA System의 빵빵한 사운드와 당시 선진적인(?) 일부 클럽들의 삐까뻔쩍한 조명들때문에,
약쟁이들이 클럽으로 몰려와서 "약 하고 들으면 더 뿅간다"며 약을 팔기 시작했다.
뭐, EDM 씬에서 마약을 빼놓고 얼마나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던 1970년대, 뭔가 다른 동네에서 재밌는 일이 일어남을 감지한 인플루언서들과 몇몇 인싸들이 이 판에 끼어든다.
만약 걔들이 그냥 "뭐야 개씹노잼이네" 하고 넘어가면 몰랐을까,
솔직히 저 동네의 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디스코뿐 아니라 덥(Dub), 랩(Rap), 레게(Raggae), 라틴 팝(Ratin pop)만 보더라도...
 
아무튼 원래는 흑인 게이를 필두로 한 아싸들의 문화였던 디스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백인 게이들을 넘어 그냥 백인들까지 끌어들이는 씹인싸 문화가 되어버렸고,
1970년대 후반에는 모든 주요 도시마다 디스코 클럽이 탄생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개봉했다.

다른건 몰라도 저 포즈랑 가슴털은 알걸?

Saturday Night Fever는 영화 자체도 흥행했지만,
동시에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대충 디스코로 가득 찬) 역시 어마어마한 실적을 기록하였고,
이러한 인기에 휩쓸려(?) 1972년 2월, 디스코가 그래미상을 받아버린다.
 
이때가 바로 디스코의 최고 전성기로 평가받는 시기이다.
 
왕좌에 앉은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머지않아, 디스코에 대한 반발심(Backlash)이 (주로 백인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 Disco Sucks! - 

누구나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 
"내가 쟤보다 나은데"라며 중얼거리거나,
"내가 쟤보다 못한 게 없는데 왜 쟤만 잘되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현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리 나보다 잘난 사람이라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한다면
"아니요? 그것보다 이게 더 나을걸요??"라고 일단 반박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니까.
 
물론 교육받고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지성 있는 교양인들이라면,
남들과 나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해 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여기서 다룰 친구들은 이런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갑자기 록이 아닌 디스코가 그래미 상을 탔다고?
See See I Can't See를 외친 이들은 음반점에서 디스코 음반들을 부수고 온갖 행패를 부려댔다.
시대의 흐름과 시장성에 타협하여 디스코 색채를 살짝이라도 얹었던 밴드들은 보이콧을 당하기도 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백인들과 언론들과 전문가(호소인)들은 이를 보고 박수치고 있었으니,
참으로 걱정되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금할 법하다.
도대체 왜 디스코를 그렇게 대차게 깠을까?
그리고 그 논리가 무엇이었을까?
 
언론과 비평가들과 전문가(호소인)들은 디스코를 크게 세 가지 이유로 공격했었다.

우선, 옷이 (전에 비해) 너무 외설적이고 겉멋만 들어 보이고 야시꾸리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Sexual Revolution이라는 사회 운동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이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성관념과 그걸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중지를 선물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운동의 연장선으로, 젊은 세대에서는 위와 같은 개방적인 복장이 유행하였다.
 
이 당시 등장했던 일부 복장들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그럴 거면 옷은 왜 입고 다니냐?"는 꼰대들의 성원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그 마저도 약과 술에 취해 벗어버리고 춤추는 미친년놈들도 많았다.
 
또 다른 이유로, 이 음악이 흑인 게이들로부터 시작된 음악이라는 점이 공격 포인트였다.

 

"흑인에다가 게이라고? 걔들이 만든 음악을 좋아한다고? 님 Hoxy..?"

이에 대한 반박은 백인 게이였던 프레디 머큐리로 마무리하겠다.
 
아마 이 이유가 그나마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디스코가 주류 음악으로 부상하면서 록 음악의 위상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록 음악을 중심적으로 방송하던 라디오 방송국들은 점차 디스코 프로그램들을 늘리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깜둥이 게이새끼들의 음악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방송들이 사라지는 사태였지만,
여기, Steve Dahl(스티브 달)이라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직업까지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였던 것이었다.

Steve Dahl

스티브 달은 시카고에서 활동하던 DJ였다.
당연히 디스코 DJ는 아니었고, 라디오 방송에서 록 음악 위주로 선곡하던 사람이었는데,
얘는 왕성한 안티-디스코 운동파이자 또라이였다.
'또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메모...
 
스티브 달은 프로그램 편성이 록 음악에서 디스코 위주로 바뀌는 바람에
본래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WDAI)에서 잘려서 매우 꼬운 상태였다.
다행히 바로 경쟁회사인 WLUP에서 데려가긴 했지만?
아 그건 모르겠고 ㅋㅋㅋ
본인 방금 디스코 엿맥이는 상상함ㅋㅋㅋ
 

- Disco Demolition Night -

Chicago White Sox(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이자 MLB의 프로모터였던 Bill Veeck(빌 비크)
아들 Mike Veeck(마이크 비크)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화이트삭스의 경기력이 부진해서 → 관객 수가 적어지고 → 수익이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자기 홈그라운드에서까지 흥행에 실패하면 모양새가 영 아니잖어?
그러자 구단주란 양반은 온갖 프로모션과 이벤트로 관중들을 모으려 하였다.
 
그러던 중 1979년 5월 2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이 경기는 7월 12일, 더블헤더 게임으로 배정되었다.
본래 MLB 측에서는 청소년 한정 반값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크 부자는 한술 더 떠서 이상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디스코 음반을 하나 이상 가져오면 입장료가 오직 98센트!"
1980년대의 98센트는, 오늘날로 대충 4달러 ≒ 5천원 정도 한다.
방금 찾아본 바로 MLB 관람석 평균 가격이 4만원쯤 한다니, 얼마나 파격적인지 감이 오시나?
이에 당초 목표였던 2만 명을 훨씬 웃돌아, 무려 5만 명의 관중이 몰려드는 초초대박 이벤트가 발생한다!
 
물론, 이 뒤에서는 다른 '이벤트'가 계획 중에 있었다.

대충 코미스키 파크

실적 부진으로 온갖 프로모션을 기획하던 비크 부자.
그들이 라디오 BJ였던 한 또라이가
"쇼핑몰에서 생중계로 디스코 앨범에 불질러버릴것이와요!"
...라고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통이면 걍 미친놈 취급했겠지만, 이들은 오히려
"그거 우리가 경기할 때 그라운드에서 해주면 안 됨?"라고 역제안을 해버린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얘들도 만만치 않은 광기를 머금고 있었나 보다.
 
당연히 거사는 대국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티브 달은 승낙했고,
자신의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했다.
그 결과, 야구 룰도 모르는 모질이들이 디스코 음반을 들고 야구장에 몰려드는 촌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첫 번째 경기는 오후 6시 13분에 종료되었다.
이제 25분의 휴식시간 이후, 6시 40분부터 2부 경기를 진행하면 되는데...

(음성 자동 지원중...)

"야이 게이 자슥들아, 이것은 폭발물이니까,
죽고싶지들 않으면 까불지들 말라고!"
 
세상에, 지프차를 탄 또라이들이 갑자기 필드에 나타난 것이다!
얘들은 지프차를 타고 필드를 빙글빙글 돌면서,
사람들이 입장할 때 제출했던 디스코 앨범들을 담아둔 큰 상자를 가져왔다.
 
관중석에서는 곧 "미국 디스코 망해라!"를 외치며
DISCO SUCKS등의 슬로건이 걸리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로 스티브 달은 디스코 앨범들을 폭파시켜 버린다.
 
This is now officially the world's largest anti-disco rally!
Now listen—we took all the disco records you brought tonight, we got 'em in a giant box,
and we're gonna blow 'em up reeeeeeal goooood.
"이 날은 공식적으로 가장 거대한 안티 디스코 운동으로 기록될 것이다!
잘 들어라-니들이 오늘 밤 가져온 디스코 앨범들, 여기 상자에 보이지?
이제 이거 싹 다 날려버리겠다!"

(음성 자동 지원중...2)

안티 디스코 세력의 열등감이 폭발한 순간이 온 것이다!
본래 잘 나가는 사람이나 장르에 대한 열등감이 폭발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이 경우에는 물리적인 폭★8이 진짜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흥행은 성공하였고, 앨범도 외야에서 터졌으니 경기에 지장도 안 줄 터였다.
이렇게 경기가 재개되어야 했으나...

실례지만 불타고 계십니다;;

갑자기 관객석에서 한 무리가 필드에 난입했다!
곧 수천 명이 된 난입자들은 덜 탄 앨범들을 플라잉 디스크처럼 여기저기 던지면서 갖고 놀았다.
이쯤 되면 이벤트가 아니라 폭동 아닐까?
실제로 위키에서는 이 사건을 "폭동(riot)"으로 기술한다.
 
슬슬 현장에 있었을 시큐리티는 직무유기했냐는 의문점이 생겼을 텐데,
당시 시큐리티는 바깥에서 경기장으로 몰래 잠입하려는 닌자들을 막는데 여념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심지어 구단주보다) 직업정신이 투철하신 분들께 존경.
 
수용 가능 인원 : 45,000
구단에서 예상한 인원 : 20,000
보안팀의 통제 가능 인원 : 35,000
몰려든 인원 : 50,000 (추정)
 
아무튼 그렇게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결국 예정되었던 두 번째 게임은 취소되었다.
폭도들은 현장에 도착한 무장 경찰들이 제압했다.

당연히 이 사건은 스포츠 기사 1면에 대문짝하게 났고, 온갖 비난에 휩싸였다.
"Sox Promotion ends in a mob scene"
"Sox의 프로모션이 폭력사태를 초래하다"
그래도 나름 공적인 미디어라고 Sox sucks promotion라고는 못한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당시에 활활 탄 앨범들은 주로 디스코였지만
흑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모든 장르들(소울, R&B 등) 역시
인종차별적이고 또라이같았던 이 사건에서 안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시기에 테크노, 하우스, 그라임 같은 장르가 있었다면 얘들도 바로 화형 당했겠지.
 
아무튼 100% 이 사건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후 디스코는 여러 시대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 사건 이후 - 

1. 디스코 이후의 장르는 어떻게 되었나?

 
이 사건 이후, 디스코를 대체할 새로운 장르들이 필요해졌다.
디스코에 대한 반발이 이렇게 큰데, 언제 미친놈들이 우리 회사에 화염병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음반사들은 아티스트들을 쪼아댔다.
 
그러다가 시카고에서는 Frankie  Knuckles의 음악이 House의 초석이 되고...
뉴욕에서는 Lerry levans의 음악이 Garage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디트로이트의 Bellieve ThreeTechno라는 음악을 탄생시키고...

사람들은 누구보다 흑인 아티스트들을 좋아하면서 왜 그 본심을 숨기는걸까?

이 셋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디스코 이후에 등장한 다른 디스코라는 점이다.
특히 저 다섯 명이 모두 흑인이고 저 중 몇 명은 게이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2. 경기 결과?

 
당일 치러졌던 제 1경기는 화이트삭스가 타이거즈에게 1-4로 완패당했다.
 
저런.
 
(당연히) 사건 이후에 2경기는 진행되지 못했고,
당시 MLB 협회장이 화이트삭스가 타이거즈에게 0-9로 몰수패당한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저런.
 
 

3. 근데 유럽에서는 저런 일 없었어요?

 
음악뿐 아니라, 모든 것들(하다못해 음식도) 호불호가 갈리는 마당에,
유럽이라고 디스코를 싫어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겠지.
 
사실, 오히려 유럽에서는 디스코가 보다 빠르게 전자화되어 새로운 장르들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 이미 유럽은 자체적인 Euro Disco씬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그중 하이 에너지(Hi-NRG, 1977~), 신스팝(Synthpop, 1977~), 이탈로 디스코(Italo Disco, 1978~)는 
유럽을 넘어 우리나라의 클럽에서도 유행했었고(롤라장),
이들의 계보를 잇는 유로비트(Eurobeat, 1987~)는 일본의 파라파라(パラパラ) 문화를 탄생시켰다.

(HINOIチーム - IKE IKE) 대충 파라파라파라파라거린다는 뜻

 
 
아무튼 다시 말하자면, 미국에서나 저랬다.
 
저런.
 
 

4.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

 
마지막으로,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떤 코멘트를 남겼을까?
 
사건 다음 날, 스티브 달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라디오를 진행했다.
다만, 당일 아침 조간신문에 박제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거사의 대부분은 좋았다.
몇몇 사람들이 과격해져서 필드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러지는 말았어야지.
에잉 나쁜 넘들ㅉㅉ"
 
이 양반은 이 사건으로 지역 법원에도 출두하였는데,
이후에도 종종 과격한 발언 등이 지적되어 끝끝내 WLUP에서도 해고당했다.
이와 무관하게 여전히 개인 라디오 방송과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가끔 코미스키 파크에서 시구도 한댄다.
 
당시 상대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매니저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남겼다:
"야구 보면서 맥주 마신다고 누가 머라하든?
근데 저 놈들은 맥주가 아니라 약을 한 게 분명하다 ㅇㅇ"
 
아직 약을 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긴 한데, 나 같아도 의심해 볼 만하겠다.
 
그렇다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빌 비크는 여론의 몰매를 맞으며, 여러 사정이 겹쳐서 팀을 팔고 야구계에서 영영 떠났다.
모지리들. 진짜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대답은 아들 마이크의 회상으로 대신하겠다.
"어떤 놈이 필드로 뛰어들 때 딱 깨달았다. ㅈ됐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같이 보면 좋을 것들 및 참고했던 것들)
* 이 글은 상당 부분 [EDM] #01. 디스코 폭파의 밤 / Disco Demolition Night (1979)을 가져왔다.
예전에 써 놓은 거 이상으로 쓸 자신이 없었다 ㅁㄴㅇㄹ
 
Nightclub (wiki)
JAZZ UNDER THE NAZIS
Disco Demolition Night (wiki)
Disco (wiki)
 
 그 외로도 꽤 여기저기서 본 내용들이 있으나 일일히 기록 안해서 기억이 안난다.
다음부터는 쓰면서 바로바로 링크를 걸던가 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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