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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음악의 세계/[번역] Ishkur's Guide to EDM

[번역] Ishkur의 EDM 가이드 - Rap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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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music.ishkur.com/#

 

- 본 글에서의 '필자'는 원글 작성자를 의미함

- 원활한 전달을 위해, 일부 불필요한 내용 제거 및 의역 포함되었음 (번역체 -> 자연스러움 목적)


Also

 Freestyling, MCing, Hip Hop

Scene / Period

 Hip hop / 1970년대 중후반


 랩(Rap)은 흑인들에 의해 탄생했다.

 

 Debbie Harry가 한 때 백인들이 랩을 시작했다고 멋지게 주장해 보긴 했으나, 그 결과물은 상당히 어색하고 이상했다. 아마 그녀가 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예술관은 그저 "라임에 맞는 단어들만 대충 나열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냥 car/far/Mars/bars/guitars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은 매우 쉽다 - 8살짜리 꼬맹이가 생각해 낸 조금 어려운 시 정도이다. 그래도 노래로서는 상당히 중독적이긴 하다.

 

 랩은 힙합 문화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이며(나머지 셋은 그라피티, 디제잉, 브레이크 댄스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섯번째 기둥으로 농구/And1 믹스테이프를 고려해 볼 수 있겠다), 프로 스포츠와 사설 감옥 산업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성장시켰다.

 

 랩의 기원은 자메이카의 토스팅 문화(Toasting traditio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60년대, 레게와 음악들이 7인치 45rpm 싱글로 나올 때, 레이블들은 습관적으로 완성곡을 Side-A에 수록하고 해당 곡의 인스트루멘탈 버전을 Side-B에 수록하였다. 자메이카인들은 DJ들이 B-side의 인스트루멘탈을 틀면 지원자가 마이크를 받아 들고 자신의 즉석 랩을 선보이는 일종의 노래방 형태의 'toasting' 파티를 즐기고는 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Master of Ceremonies" 혹은 MC로 알려졌고, 그들의 즉석곡은 "프리스타일링(freestyling)"으로 발전했다.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사를 더듬거나, 리듬에서 벗어나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기도 했다(딱 노래방의 느낌이다). 반대로 이를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들은 "플로우(flow)"가 있다고 했으며 (노래의 특성을 반영한 운율과 리듬), 그들은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의 음유시인과도 같았다. 

 

 1970년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사건이 있었다:

 테크닉스(Technics)의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direct drive turntable)인 SL-1200이 1972년에 발매되어, 이후 30년 동안 DJ들의 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장비가 되었다. 턴테이블(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도)은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SL 시리즈는 손으로 판을 조작할 수 있다는 주요한 기능이 있었다. 이는 이전의 벨트 구동식 턴테이블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으로 붙잡고 있다가 놓으면, 판이 다시 원래의 속도로 회전할 것이다.

SL-1200의 실물도

 SL 시리즈는 DJ들이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인스트루멘탈을 멈췄다 재생하고를 실시간으로 반복할 수 있게 했으며, 심지어 곡을 거꾸로 재생하거나, 거꾸로 재생하다가 원래대로 재생하거나, 거꾸로 재생하다가 원래대로 재생했다가 거꾸로 재생했다가 원래대로 재생하는 짓을 연속해서 매우 빠르게 반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기법은 "스크래칭(Scratching)"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되었고(이 기법이 Turntablism이라는 기술적인 장르를 발전시켰다), 누가 얼마나 빠르게 스크래칭을 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DMC World Championships라는 연례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다른 주요한 사건이라면 자메이카의 경제가 1970년대 초반에 나빠져서, 섬에서만 살던 거주민들이 더 나은 기회를 위해 해외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부는 캐나다에 가서 20년 만에 농촌을 트랙과 논밭 강국으로 바꿔놓았다. 뛰어난 일부 토스터들과 DJ들을 포함한 일부는 특히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뉴욕의 할렘과 브룽크스(Bronx)에서 랩을 시작했고, 여기서 레게와 덥 대신에 뉴욕에서 새롭게 등장한 펑크와 디스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랩 레코드들은 디스코 그루브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DJ들이 동일한 디스코 레코드 2개를 두 대의 SL-1200에서 브릿지 부분만 번갈아가며 재생하며 랩을 할 수 있도록 곡을 늘렸기 때문이다. 이 "hopping" 테크닉 혹은 "Hip hop"은 곧 이 문화의 이름이 되어버렸다(주장에 의하면).

 

 곧 음악 산업계에서는 DJ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그들을 착취하기 도와주기 시작했고, 레코드 레이블들이 인기 있는 디스코/펑크들의 8-10분짜리 믹스를 12인치 33 rpm으로 내면서 DJ들은 계속해서 hip hop을 안 해도 되게 되었다. 시장의 힘에 기대면서, 이후 세대의 DJ들은 더 게을러지고 덜 숙련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가 되면서, 랩 제작자들과 MC들은 디스코 음악을 덜 사용하게 되었고(왜냐하면 그게 다 돈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시장을 강타하던 TR-808과 같은 새로운 드럼 머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드러머를 구하기 힘들었던 기타 밴드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록 음악계에서는 전혀 드럼 같지 않다고 퇴출되었지만, TR-808의 맛있고 깊은 베이스 킥은 이후 혼자서 일렉트로(Electro)테크노베이스(Technobass)와 같은 장르들을 탄생시킨다.

What a TR-808 might look like.

 TR-808은 기대했던 것보다 덜 팔려서, 이류 시장이나 위탁 시장에서도 할인되어 판매되던 기종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가난하지만 간절하고 열정적인 랩 프로듀서들의 눈에 띄어서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된다.

 

 1987년에 발매된 E-mu SP-1200과 같은 샘플러는 랩 작곡가들의 활동을 더 편하게 해 주었다. 이제 랩 제작자들은 다시 젊은 시절의 펑크, 소울, R&B와 디스코로 돌아왔다. 그들은 샘플러로 드럼 브레이크만 취하여, 실제로는 4초에 불과한 음악을 단 하나의 기기만으로 새로운 곡(때로는 전체 앨범)을 만들었다. 이 시점부터 랩 음악은 만들기 굉장히 쉬워졌고, 곧 지역 단위로 씬이 나누어지기 시작한다.

 

 70년대의 초기 랩 음악의 예시를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 시절의 래퍼들은 자신들이 하는 랩을 이후 세대의 누군가가 관심을 가질 거라고 거의 생각조차 안 했었다. 따라서 랩이 70년대 초반정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녹음하여 남기지를 않았던 것이다. 부분적인 이유라면, 랩은 초기에는 라이브 음악의 형태로 간주되었었고, 라이브 퍼포먼스의 그 에너지는 절대로 레코드판 따위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무런 증거가 없지만, Kool Herc는 자신이 그 시기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보다 나은 이유를 대자면, 당시 랩을 하던 사람들은 할렘이나 남부 브룽크스의 가난한 흑인 청년들이었으므로 직접 레이블을 만들거나 녹음해서 자신들의 음악을 팔 수단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빠르게 말하는 스킬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마케팅이나 판매 같은 자세한 비즈니스 전략은 그들의 분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All Platinum Records의 임원 중 한 명이던 Sylvia Robinson가 맨해튼의 나이트클럽에서 랩을 듣고 관심을 가지면서 장르가 첫 번째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처음 만나는 세 명의 래퍼들로 뭔가를 만들어보려 했고, 스튜디오 스타일로 The Sugarhill Gang이 탄생하였다.

 

 보다 아름답게 말하자면, 랩은 악명 높은 뉴욕 대정전이 발생했던 1977년 7월 13~14일에 공식적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가 이틀 동안 정전되면서, 주민들은 문명의 요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매드맥스인데 덜 사막이고 보호구만 안 꼈다).

 도시 중심부의 시민들은 극단적인 소비가 용인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많은 야심 있는 래퍼들과 작곡가들이 음악 상점가를 약탈하면서 믹싱 보드와 DJ 장비들을 손에 넣었다. 당시의 래퍼들과 DJ들이 인정했으니, 진실 여부의 논란이 없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하룻밤만에 도시는 랩 음악, 랩 레이블, 랩 레코드와 퍼포먼스로 넘쳐나게 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상관관계 = 인과관계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도시의 정전이 음악의 발전에 이바지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음악 산업은 어두컴컴한 한밤중에 탄생했다.

  따라서 랩 음악이 1980년대 이전에 산업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1972년을 랩 음악의 기념비적인 시작 연도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랩은 DJ들이 래퍼들이 계속 랩을 할 수 있도록 비트를 깔아주기 전 까지는 랩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이는 SL-1200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차트에 들었던 랩은 Sugarhill Gang - Rapper's Delight (1979)로, 15분 동안 갱들이 Chick - Good Times의 그루브에 맞춰 프리스타일로 랩을 할 뿐이었다. 초기의 더 많은 랩 음악들은 파티 음악이었기에, 가사들은 파티를 즐기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 내용만 있었지 여운이나 저속한 콘텐츠는 없었다.

 

https://www.mixcloud.com/Ishkur/the-party-rap-mix/

 

 초기의 가장 훌륭했던 파티 랩 믹스를 들어보라.

 

 이는 Grandmaster Flash - The Message에서 변하게 된다. 1982년 발매된 이 곡은 Kurtis Blow와 Sugar Hill Record의 '나는 행복해요'라는 가사로부터 방향을 틀어버렸다. 이 곡은 자국민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적인 폭력과 도시에서의 삶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이 시점 이후, 구 시대의 랩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들이  여러 하위 장르로 나누어졌다. TurntablismConscious Rap, Nerdcore와 같은 일부는 미학에 강점을 두었지만, 대부분은 EastcoastWestcoastSouthern과 같이 지역적으로 분화되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에 갱스터 랩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갱스터들은 힙합 씬을 중요한 방식으로 장악했다. 옛날의 그 밝고 기분 좋은 파티 랩은 좋았지만, 10년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르의 계보)

 Rap

 

* And1 mixtape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동안 나오던 비디오.

각 지역의 길거리 농구들 중, 소위 "하이라이트" 영상들을 모아놓은 비디오로, 배경음악으로 랩이 사용되었다. 

AND1- mixtape vol.3

고인물 무빙에 정신을 못 차리는...

 

* Emu SP-1200와 샘플링에 대한 추가 내용은 아래 글 (콜라주)를 참고해볼 것:

https://coldhearted-sirius-alpha-22.tistory.com/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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