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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음악의 세계/[번역] Ishkur's Guide to EDM

[번역] Ishkur의 EDM 가이드 - Collage (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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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music.ishkur.com/#

 

- 본 글에서의 '필자'는 원글 작성자를 의미함

- 원활한 전달을 위해, 일부 불필요한 내용 제거 및 의역 포함되었음 (번역체 -> 자연스러움 목적)


Also

 Montage, sound Collage, sampling, tape looping, mashup...

Scene / Period

 Industrial/Goth, 50년대 중반


 Collage(콜라주), 혹은 Sound collage, Tape Editing, Sample music (후에 Plunderphonics로 발전)이라 불리우는 음악은 다른 음악의 일부분을 이용해 만든 음악이다. Collage는 프랑스어로 "Gluing (접착)"이라는 뜻으로, 다른 작품의 일부를 자르고 붙이는 형태(샘플링)를 의미한다.

 

 혹자는 콜라주의 기원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기도 하는데, 1879년 이전에는 녹음이라는 기술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이 장르가 반드시 오늘날의 전자적인 형태의 녹음 기술과 녹음본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충 Collage의 모습. (사진처럼 광고 덩어리 같은) 콜라주 사운드를 만든다면, 아마 저작권 위반 딱지가 오지게 붙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니 괜찮지 않을까??

 콜라주는 Musique Concrete(구상 음악)의 직계 후손쯤 된다. 둘 모두 샘플링의 활용이라는 점에서는 큰 궤를 같이 하지만, 콜라주는 무엇을, 어떻게, 왜 샘플링하는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이상한 실험가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구상 음악은 비상업적인 소리와 그다지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들에 관심이 많았다. 반면에, 콜라주는 이미 완성된 기성 작품들을 거의 등장과 동시에 새로운 장르로 바꾸었고, 이 흐름에서는 제 아무리 진지한 작품이더라도 패러디를 피할 수 없었다.

 

 콜라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성 작품(리소스)들이 필요했으므로, 레코딩 산업(굳이 음악 뿐 아니라 TV, 라디오, 영화, 뉴스 서비스를 비롯한 온갖 방송 산업)이 조금 더 성장하여 양질의 소리들이 축적될 때 까지 기다려만 했다. 뿐만 아니라 손쉽게 다른 소리들을 녹음하고 샘플링할 수 있는 기술 역시 필요했는데, 이러한 기술은 1950년대가 되어서야 등장하였다.

 

 멀티 트랙 레코더(1955년 발매된 Ampex 8-track 레코더 등)의 발전으로, 스튜디오와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레벨로 도약할 수 있었다(아마 이와 관련된 내용은 어딘가에서 다시 설명하지 싶다). 

 

 아마도 첫 번째 공식 콜라주 작품은 1956년 발매된 Buchanan And Goodman - The Flying Saucer로, 당시에 유행했던 곡들의 일부를 잘라 뉴스 방송의 컷어웨이 개그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 작업을 손으로 릴-투-릴 레코더를 일일히 조작하면서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게 뭔지는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면 알려주시겠지?)

 

 당연히 Buchanan And Goodman은 이 건으로 고소당했다 - 근데 이겼다. 아마도 이 산업이 너무 파릇파릇하기도 했고, 판사들이 이 경우가 무슨무슨 법에 위배된다고 딱 잘라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너무나 새로운 영역이었던지라, 당시에는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어디부터가 불법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제가 없었다. 심지어 판사는 위 곡을 "참신하고 천재적인데?"라고 평가했다. 이 순간부터 샘플링은 거의 합법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 당시에는 샘플링에 대한 진입 장벽이 너무나 높았으므로 그리 문제되지는 않았다. 소수의 개인만이 콜라주를 만들 수 있을 만한 수준의 장비를 구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 급성장중이던 레코딩 산업은 콜라주로부터 탄생한 모든 작품들에 대한 예술/음악/상업적 권리를 거부했으니까.

 

 콜라주는 여러 형태로 존재하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의 경우, 이름 없는 소녀 팬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보내는 팬레터와 비슷한 작품인 Audrey - Dear Elvis와 같은 일회성 작품부터, 조금 다른(=과격한) 방향으로 콜라주한 James Tenney - Collage #1 와 같은 작품이 있었다. 당시에는 엘비스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곡을 샘플링하는 경우가 많았나보다.

 추가로 The Beatles - Revolution 9도 있다 - 콜라주의 명품 망작으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이 뭔가 재밌는걸 찾아보려고 Abbey Road Studio의 작업실을 습격(?)해서, 이틀동안 망부석마냥 그 자리에 틀여박혀서 이것저것 콜라주 했다는 작품이다. 무려 8분동안 정신분열증에 걸릴 것만 같은 앨범(대충 온갖 이상한 소리 75%와 그나마 음악같은 소리 25%)을 듣고 있으면, 누구든지 "이 미친년 좀 스튜디오에서 끌어내라"라는 말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필자는 아니라 생각한다.

 

 레코딩 산업은, 세기 말에 청소년들의 방을 점령하여 영혼을 갉아먹는 '돈에 미친 음악을 찍어내는 기계'로 변하였다. 그 과정에서 업계는 음악 소유권과 관한 분쟁을 수도 없이 겪었으며, 그 결과 업계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법률단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콜라주 음악은 점점 전투적이고 반항적으로 변하여, 마치 문화를 교란하려는 자본주의 세력과 싸우는 혁명 투사(with 체 게바라 셔츠)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들은 Copyright 대신 Copyleft나, kopyright와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저작권법을 조롱하였으며, 앨범에는 중의적인 의미로 (k) 라는 심볼을 박아넣었다. ( k는 그리스어 kallisti의 앞글자이다. 이 단어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불화의 여신인 Eris가 신들의 잔치 중에 던진 사과에 박혀있었던 단어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NegativlandThe Residents같은 그룹은 대형 레이블의 유명 곡들을 샘플링하는 아티스트로 활동하였으며, 그들은 원작자로부터 고소당하면 그마저 소재로 써먹어서 인터넷 미디어에 뿌려버렸다.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콜라주는 80년대까지 틈새 시장으로서 남아있었다.

 

 그리고 샘플러가 등장하게 된다 - 주로 E-mu SP-1200 샘플러(1987)였다;

 

1986년에 나온, 훨씬 우수한 성능의 Akai S900 샘플러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3000$나 지불할 수 있는 백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샘플러는 60년대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으나, 항상 엄청난 규모의 부가 시스템을 필요로 하였고, 범접 불가능할 정도로 비쌌다. 그 점이 콜라주 아티스트들의 열기를 잠재울뻔 했으나, 80년대 들어 샘플러는 더 작아지고, 싸지고, 기능면에서 더 특화되었다.

 

 E-mu Systems는 이전에도 여러 종류의 드럼 머신과 샘플러를 내놓았으나, SP-1200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준 장본인이다. 싸고, 작고, 배우기도 쉬웠다. 이제 하나의 히트곡 뿐 아니라 앨범, 커리어, 심지어 하나의 레이블 전체를 이 하나의 기계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SP-1200은 신의 선물과도 같았으나, 음악 산업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심각한 재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기계의 양날의 검을 보여준 아티스트는 Bill Drummond와 Jimmy Cauty이다.

 그들은 Justified Ancients of Mu Mu (JAMs)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앨범을 만들었다 (ABBA - The Queen And I를 샘플링 한 부분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곧 ABBA측에서 나머지 앨범을 판매하지 말라고 고소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완성된 앨범을 모두 처분한 뒤 저작권 상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모조리 잘라내고 "집에서 이렇게 복구해서 들으세요" 라는 지침서를 동봉해서 다시 발매해버린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저작권법이 뭣같다는 내용의 샘플로 가득 찬 앨범을 내버리고, 샘플링으로 가득 찬 히트곡으로 한 탕 땡기더니, 이름을 The Kopyright Liberation Front(KLF) 으로 바꾸고 3년만에 전자 음악계를 완전히 뒤엎을 업적을 세운다. 그들은 약간의 마케팅 지식과 SP-1200 샘플러로 히트곡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책을 발매했는데, 이후 Chumbawamba부터 Chainsmokers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책을 참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KLF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나중을 위해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러나 위의 일련의 사건들은 SP-1200 그 자체가 다른 음악 장르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 힙합, 하우스, 뉴비트, 힙하우스, R&B, 브레이크 등의 장르들로 대표되는 황금기가 SP-1200 덕분에 시작될 수 있었다. 낮아진 샘플링 난이도는 콜라주 뿐 아니라, 상업적인 영역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다양한 국가에서 독자적인 음악 저작권법을 두고 있었으나, 약간의 교통 정리가 있은 후로 허가 받지 않은 샘플링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더라도) 금지되었다. 이는 그저 예술적인 목적으로만 작업하는 콜라주 아티스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작품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활동하던 아티스트들에게는 엄청난 제약으로 다가왔고, 결국 장르는 침체되었다.

 

 상업적인 샘플링이 가능했던 시대는 10여년(87~96년)간 존재하였으며, 그 피크는 1989년 발매된 The Beastie Boys - Paul's Boutique였다.

콜라주 앨범의 표본... with rapping

 Dust Brothers는 곡에서 수백개의 샘플들을 사용하였고 (보컬을 제외하면 그 어떤것도 자체적인 것이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Paul's Boutique는 단지 성공적인 앨범이었을 뿐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대만의 유물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곡이 차트에 오르거나 수백만장씩 팔리는 광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법적이든 재정적으로든 이러한 형태의 예술은 더 이상은 불가능해졌고, 문자 그대로 '멸종(extinct)'되었다.

 

 하지만 이는 콜라주 음악이나 샘플링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꽤 대조적으로, 2000년대에는 히트곡 등에 랩 아카펠라를 매칭하길 좋아하는 Turntablism과 하위 장르들로부터 Mash-up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들이 앞선 황금기의 그 샘플링과 관련된 어떤 감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콜라주 음악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 보다 구체적으로, 음악에서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된다'라는 말을 싫어한다. 음악의 저작권과 소유권에 관한 법적인 제약은 콜라주라는 장르를 상업적으로는 효과적으로 죽여버렸으나,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예술의 귀중한 형태 중 하나로 남아서 Soundcloud나 Bandcamp와 같은 무료 음악 공유 플랫폼들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창의성 앞에서는 법이고 뭐고 없으니까.

 

 특히 콜라주처럼 유머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음악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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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투릴 레코더 (오픈릴 테이프) : 자세한 내용은 킹갓위키를 참고하시오.

간단히 소개하자면, 구형 녹음기이다. 구형이니 무겁고, 내구성도 그지고, 품질도 떨어지고, 비싸겠죠?

그래서 안쓴다.

 

 

+ 비틀즈의 Revolution 9 : 자세한 내용은 여기

 

 1968년 5월 30일, 존 레논의 "Revolution"에 수록될 곡들을 처음으로 녹음하는 자리에서 기원되었다. 노래들 중 20개는 10분 이상 지속되었으며, 다음 두 세션에 과하게 오버더빙 되었다. 특히 Mark Lewisohn은 마지막 6분을 두고 "순수한 혼돈이었다... 악기들의 불협화음과, 피드백과 존 레논이 "이거제!!"를 외치고, 다시 이상한 소리나 지르고... 요코(존 레논의 아내)의 말소리나  'you become naked' 같은 구절, 그리고 온갖 잡다한 홈메이드 사운드 이펙트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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