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발생한 그라임(UK Grime)이라는 장르는,
언뜻 들어보면 그냥 랩(Rap)이나 힙합(hip hop)과 유사하다.
설명하기 귀찮으면 "네 맞워요~" 라고 하면 되지만,
사실 힙합 뿐 아니라 당시의 개러지와 드럼 앤 베이스 씬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100% 맞다고 수긍하기는 애매하다.
[ 간단한 영국의 분위기 ]
사실, "언제까지나 미국의 유행만을 쫓아갈 수는 없어!"라며 열심히 미국 음악을 모방하였던,
영국의 암흑기가 있기는 했었다.
물론 그 결과물이 미국 음악과는 또 달라서 결과적으로 독특한 장르들이 탄생하긴 하였고,
이를 필자는 편의상 "UK당했다"라고 표현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이 암담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 상당히 많은 장르에서 차용되는 베이스들이 다 UK Garage에서 나온거긴 하니까.
그 유산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긴 하다.
아무튼, 뉴욕의 얌전하고 조신한 개러지 음악은
영국에서 빨라지고, 엇박으로 조교당하고 자메이카 음악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점 폭력적이고 몽환적이고 공격적인 베이스 라인을 갖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아메리카 스타일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고(?)있던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힙한 합인 힙합 되시겠다.
[ 간단한 힙합의 역사 (너무 간단함) ]
힙합 문화는 본래 미국의 할렘가 등에서 자라나던 청소년들의 문화였다.
이들은 가난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스튜디오나 녹음실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대와 악기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갓랜드"사는 또 다시 세기의 명작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여기에서도 설명했듯이, 당시 기준으로 무려 TB-303과 경쟁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니 뭐, 얘들도 처음부터 이런 악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악기답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려나.
학생들이 "드럼 시퀀서에서 드럼 소리가 안나요;;" 라며 중고시장으로 쏟아져나온 TR-808을 헐값에 사들인 뒤,
이를 이용해 드럼 비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브레이크 비트 샘플을 턴테이블 등으로 계속 반복재생 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자면 글 하나가 나올테니 우선은 여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이 비트에 유일하게 공짜 악기였던 목소리를 얹어 음악을 만들거나,
비트에 몸을 맡기며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게 초기의 힙합 문화였다(고 한다).
이들은 현장에서 MC가 직접 랩을 하고,
"오우~ 홀리 쉣! 댓 워즈 어우썸~~!!"등의 관객 호응을 중요시하였기에,
현장감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앨범을 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실 스튜디오도 없었지만.
이게 그 명예로운 죽음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 영국의 힙합 꿈나무들 ]
아무튼 이 상황은 영국의 흑인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얘들도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성장하고, 제대로 된 스튜디오나 녹음실을 마련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이제는 시대가 발전한 2000년대라는 점이었다!
시대가 21세기라는 점은 세 가지 측면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첫째, 이미 정글(Jungle)이 충분히 발효(?)되어, 드럼 앤 베이스(DnB) 씬이
댄스 음악 컬쳐에서 큰 손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는 점이고,
둘째, 스튜디오나 악기를 일일히 마련하는 것 보다는 훨씬 산 가정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 무렵 Imagine-Line사에서 FL Studio를 출시하였다.
이제 더 이상 브레이크 비트를 반복재생하거나,
즉석에서 드럼 시퀀서 따위로 연주해야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왜 하필 FL Studio냐??
큐베이스도 있고, 에이블톤도 있고 이것저것 많잖아??
그냥 힙합 비트 만들기가 가장 편해서 그렇다.
여타 프로그램들에 비해, FL 스튜디오는 이름부터가 Fruity 'loops',
즉 "루프 패턴"에 굉장히 특화되어있다.
같은 드럼 패턴이나 샘플이 질리도록 반복되는 힙합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다.
[ 주류 장르로의 부상 ]
이 곡들은, 처음에는 해적 방송으로 전파를 타다가
아싸 문화를 빼앗은 인싸들에 의해 점점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의 UK 개러지 음악(스피드 개러지, 투스텝 등...)들에서,
여성 보컬과 MC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라디오 쇼 등에서 인스트루멘탈(Inst) 및 덥 버전(Dub version)을 즉석에서 커버하고는 했는데,
청취자들 중 일부는 소울과 R&B의 색이 짙은 개러지가 아니라 정글과 레이브 씬의 영향을 더 깊게 받은,
소위 말하는 "Darker Garage (더 다크한 개러지)"를 선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그라임이 부상하는데 밑장판을 깔아준것일까?
때마침 뒷골목의 기 센 청년들의 와일드한 힙합이 개러지가 융합되면서 그들의 눈에 띄었나보다.
그라임은 기존 개러지 음악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힙합 치고는 빠른 140 BPM의 속도(보통 랩은 100 BPM정도),
드럼 앤 베이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브레이크 비트(Breakbeat) 샘플의 사용,
전자 악기의 전면적인 사용 (컴퓨터 음악이다보니),
공격적이고 거친 사운드 샘플들(하류 계층 흑인들의 냉혹한 환경?) 등이 그러하다.
여기서 두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우선 그라임에서 본격적으로 워블 베이스(Wub Bass) 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일렉트로나 덥스텝 등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베이스들인데,
사실 투 스텝 시절부터 워블 베이스를 사용한 트랙이 일부 있긴 하였으나,
LFO와 베이스가 전면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 장르가 처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른 하나는 이 장르의 대표적인 템포가 140 BPM이라는 것인데, 별 이유가 없다.
FL 스튜디오를 켜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있는 디폴트 속도가 140 BPM이라서 그렇댄다.
만약 디폴트 템포가 100이었으면, 이렇게 빨라지진 않았으려나?
[이름의 유래]
"그라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2005년 「Spin Magazine」이라는 영국의 음악 잡지에서
이 장르의 느낌이 "Grimy 하네여" 라고 언급한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니 하이 에너지도 그렇고, 원래 그렇게 이름이 붙는건가?
그 전까지는 매우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8-bar : FL 스튜디오 기준, 8마디 단위로 패턴이 반복되어서
Nu Shape : 16~32번째 마디에 주로 벌스(Verse)가 들어가서
Sub-Low : 베이스 라인이 (매우) 낮은 음역대를 차지해서
Eski-beat : 이 장르의 초창기 때 나온 앨범 「Eskimo (2002)」에서 따온 이름
사실 위의 이름(?)들은 오늘날 그라임의 하위 장르로 불리고 있으며,
이러한 하위 장르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을 "그라임(Grime)"이라고 부르기로 합의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 장르는 EDM 역사로 보자면 UK Garage 씬에서 파생된 장르이고,
힙합의 역사로 보자면 영국에서 다양한 음악적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장르이다.
위에서는 거의 스치듯이 지나가서 그렇지,
UK 개러지가 애초에 드럼 앤 베이스 씬과 댄스홀/레게/덥 등의 자메이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생각해보자.
그라임은 2000년도 후반부터 미디어의 조명에서 멀어지며 쇠락하게 된다.
위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레코드 레이블들, 라디오, 미디어는 그래서
이 장르로 뭘 해야하는지 깨닫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만약 영국에 쇼미가 있었다면 장르의 황금기가 조금 더 오래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도대체 우리나라 힙합은 언제 쯤 떨어질까)
미디어의 조명에서 멀어진 그라임은, 이내 얼마 남지 않은 자리 마저
곧이어 등장한 덥스텝이나 UK Funky같은 신흥 장르들에 빼앗겼다.
아티스트들은 더 힙하고 흥하는 장르로 이동하였고,
얼마 남지 않은 아티스트들은 무대를 빼앗겼다.
하지만 괜찮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음악을 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라임은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
...아마도?
근데 써놓고 보니, 그냥 영국 힙합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 싶다.
그냥 맞다 하자...
'냉혹한 음악의 세계 > [LEGACY] EDM 장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DM] #25. 퓨처 개러지 / Future garage (2010s~) (0) | 2022.02.05 |
---|---|
[EDM] #24. 덥스텝 / Dubstep (2000s ~ ) (0) | 2022.02.03 |
[EDM] #21. 스피드 개러지 / Speed Garage (Early to mid 90s) (0) | 2022.01.28 |
[EDM] #22. 투 스텝 개러지 / 2-step Garage (0) | 2022.01.26 |
[EDM] #20. 덥 음악 / Dub Music (1960s~) (0) | 2022.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