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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음악의 세계/[LEGACY] EDM 장르

[EDM] #01. 디스코 폭파의 밤 / Disco Demolition Night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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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사람인 이상, 누구나 살면서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
"내가 쟤보다 나은데"라며 중얼거리거나,
"내가 쟤보다 못한게 없는데 왜 쟤만 잘되냐" ...같은거말이다.

본인은 이 현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리 나보다 잘난 사람이라도
"이렇게 해보는건 어때요?" 라고 해도
"아니요? 이게 그거보다 나을걸요??"
라고 일단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물론 교육받고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예의있는 대부분의 교양인들이라면,
남들과 나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존중해주고 이해해 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이 글에서 다룰 친구들은 이런 유형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아무튼 처음으로 소개할 사건은
"Disco Demolition Night"

열등감에 사로잡힌 몇몇 얼간이들과
이에 선동된 다른 모지리들이 일으킨 부끄러운 흑역사이다.



Disco. Demolition. Night.

Demolition은 사전적으로 "파괴"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우선 디스코(Disco)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파괴당했는지를 알아봐야겠다.
물론 Night는 밤이니까 대충 밤에 일어난 사건이구나~ 정도는 알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디스코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디스코를 설명한 글들(위키나, 나무위키나, 언젠가 본인이 쓸 글)을 참고하시오.
여기서는 간단히 요약만 하겠다.

196~70년대, 유럽의 각지에선 Discotheques, 쉬운 말로 'Disco Nightclub'이 생겨나고 있었다.

기존의 클럽들이 주크박스를 사용하고 라이브 밴드를 초청하였다면,
이 시기의 클럽들은 점차 턴테이블을 준비하고 Disc Jokey(DJ)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크박스에 상상화

밴드를 고용하면 돈이 많이 깨지지만, 레코드 판이랑 그걸 재생할 장비만 있으면 돈이 훨씬 덜 드니까.
게다가 쥬크박스는 노래가 끝나면 새로 재생할 판을 갈아끼워야했지만,
2개의 턴테이블을 사용한다면 노래를 연속적으로 재생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잼민이같이 '주크박스 2개 쓰면 않되요?'
같은 말은 말도록 하자.
자연스럽게 이어질 정확한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잖아.

아무튼 + 그러나,
미국의 밴드는 유럽보다 더 오랫동안 바와 클럽의 무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Rock Culture에서 배척당하던 소수 집단(흑인들, 이민자들, 히스패닉, 게이들)이

"흥 삐졌어 우리끼리 놀거야!"
라며 자신들만의 댄스 음악들을 섞어서 만든 음악이 디스코이다.

근데 이 음악이 생각보다 잘 나가는데?
그리고 언제까지 밴드 부를거야 우리도 이제 턴테이블 좀 써보면서 디스코 좀 틀어보자

이런 마인드 덕분에(?) 결국 미국의 밴드들도 점차 디스코 밴드나 DJ와 턴테이블에 밀려나기 시작했고,
당연히 백인뽕에 가득 찬 락 팬들이 이를 가만히 지켜만보고있지는 않았다.

See See I can't See를 외친 이들은 음반점에서 디스코 음반들을 부수고 온갖 행패를 부려댔다.
시대의 흐름과 시장성에 타협하여 디스코 색채를 살짝 얹었던 밴드들은 보이콧을 당하고는 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백인들과 언론들은 그걸보고 박수치고 있었으니 참으로 수준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고 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ㅋㅋ
1977년,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영화, 「Saturday Night Fever」가 대박을 쳐버린다.
영화는 몰라도 저 포즈는 잘 알걸?

동시에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대충 디스코로 가득 찬) 역시 어마어마한 실적을 기록하였고,
이러한 인기에 휩쓸려(?) 1979년 2월에 디스코가 그래미상을 수상해버리고야 만다.

그러자 일부 백인들은 디스코에 대놓고(?) 적개심을 품기 시작하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옷이 (종전에 비해) 너무 외설적이고 겉멋만 들어보이고 야시꾸리하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Sexual Revolution 사회운동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이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성관념과 그걸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중지를 선물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운동의 일환(?)으로 젊은 세대에서는 개방적인 복장이 유행하였다.

이 때 등장했던 복장 중 일부는 굉장히 파격적이었고,
그 마저도 약과 술에 취해 벗어버리고 춤추는 미친년놈들도 많았다.

확실히... 뭔가 파격적이긴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음악들이 앞서 말했듯이 흑인 게이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좀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 이 음악을 좋아하던 백인 젊은 남자애들이 전부 게이는 아니잖아?
(만약 여자가 좋아하면 뭐 어찌되는건지도 의문이다)
그냥 만든 놈이 게이라고 트집잡는건데,
저 논리대로라면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였으니 퀸 음악을 좋아하는 애들도 다 게이이다.

뭐 쟤네 말 대로라면 그렇다구.

아무튼 이런 개논리는 언론과 비평가들을 통해 꾸준히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디스코에 반감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Steve Dahl이 "디스코 ㅈ같다!" 라고 쓰인 옷을 보이고 있다. 이 양반에 대해선 바로 밑에 나온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디스코가 그래미 상을 수상하자,
머지않아 "Disco Sucks!" 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게 된다.
무슨 뜻인지는 해석 없어도 알겠지 뭐.

길고도 길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 락 음악에서 배척된 사람들이 만든 디스코가 잘나갓따.
  • 락 음악을 좋아하던 백인들은 이게 아니꼬왔다.
  • 사실 조금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으나, 크게 달라질건 없을 듯 하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거대한 사건이자, 디스코의 몰락에 쐐기를 박아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1979년 7월 12일 발생한
"Disco Demolition Night"이다.


사건이 발생한, 시카고 일리노이주의 Comiskey Park

"Chicago White Sox"의 구단주였던 Bill Veeck와 그의 아들 Mike Veeck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White Sox의 경기력이 부진해서
→ 관객 수가 적어지고
→ 그러면 돈을 못 벌게 된다는 것이었다.

자기 홈그라운드에서마저 인기가 시들하면 모양새가 영 아니잖어?
그러자 구단주란 양반은 선수들의 경기력과는 무관하게
온갖 프로모션과 이벤트로 관중들을 모으려하였다.


그러던 중 1979년 5월 2일.
Detroit Tigers- Chicago White Sox의 매치가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이 경기는 7월 12일, 더블헤더 게임으로 배정되었다.

본래 MLB측에서는 7월 12일의 두 번째 경기에 대해서는 청소년 한정 반값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Veeck 부자는 한 술 더 떠서 이상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Disco 음반을 하나 이상 가져오면 입장료가 오직 98센트!"
1980년대의 98센트는 2022년 기준 대충 4달러 < 5천원 쯤 한다.
오늘날 미국 야구장 관람권 가격이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MLB 관람석 평균 가격이 4만원쯤 한다니 감이 오려나?
이에 당초 목표였던 2만관중을 넘어서 무려 5만명의 관중이 몰려드는 초초대박 이벤트가 발생한다!

물론, 이는 사전에 다 계획된 일이었다.

사건 발생 40주년 기념(?) 티셔츠.

Steve Dahl 이라는, 시카고 DJ가 있었다.
(생긴 모습은 위의 Disco Sucks! 티셔츠를 입고있던 사진을 참고하자.)
디스코 DJ는 아니었고 라디오 방송에서 락 음악 위주로 선곡하던 놈이었는데,
얘는 왕성한 안티-디스코 운동파이자 또라이였다.
또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메모...

이 Steve Dahl은 프로그램 편성이 Rock에서 Disco로 바뀌는 바람에,
본래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WDAI)에서 잘려서 매우 꼬운 상태였다.
다행히(?) 바로 경쟁 회사인 WLUP에서 데려가긴 했지만, 그건 모르겠고ㅋㅋㅋ
본인 방금 디스코 엿맥이는 상상함ㅋㅋㅋ


실적 부진으로 온갖 프로모션을 기획하던 Veeck 부자.
그들이 Steve Dahl이라는 또라이가
"쇼핑몰에서 생중계로 디스코 앨범에 불질러버릴거에오"
라고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통이면 걍 미친놈 취급했겠지만, 이들은 오히려
"우리가 경기할 때 그라운드에서 터뜨려주면 안됨?"
라고 제안을 해버린다.
끼리끼리라고, 얘들도 만만치않은 또라이였나보다.

당연히 거사는 대국적으로 치뤄야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던 Dahl은 승낙했고,
자신의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했다.
그 결과, 야구 룰도 모르는 모질이들이 디스코 판을 들고 야구장에 몰려드는 촌극이 발생한 것이다.

첫 번째 경기는 오후 6시 13분 종료되었다.
이제 25분정도 휴식한 다음, 40분부터 2부 경기를 진행하면 되었을텐데...

"야이 게이자슥들아, 이것은 폭발물이니까,
죽고싶지들 않으면 까불지들 말라고!"


세상에,
지프차를 탄 또라이들이 갑자기 필드에 나타난 것이다!

얘들은 지프차를 타고 필드를 빙글빙글 돌면서,
사람들이 입장할 때 제출했던 디스코 앨범들을 담아둔 큰 상자를 가져왔다.

DISCO SUCKS 문구가 보인다.

관중석에서는 "미국 디스코 망해라!"를 외치며
대충 비슷한 뜻의 슬로건들이 걸리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로 Dahl은 디스코 앨범들을 폭파시켜버린다.

"이 날은 공식적으로 가장 큰 안티-디스코 저항으로 기록될거다! 잘 들어라 -
너네들이 가져온 디스코 레코드들을 이 박스에 담았고,
이제, 모조리 날려버리겠다!!"

화르륵

안티-디스코 세력의 열등감이 폭발한 순간이 온 것이다!
본래 잘 나가는 사람이나 장르들에 대한 열등감이 폭발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이 경우에는 디스코 앨범들이 물리적으로 폭발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실례지만 불타고 계십니다;;
 
본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흥행에는 대성공하였고, 어차피 앨범도 외야에서 터진거니 경기에도 영향을 안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관객석이 술렁이더니, 한 무리가 필드에 난입했다!

곧 수천 명이 된 난입자들은 덜 탄 앨범들에 불을 붙이며,
디스코 앨범을 마치 플라잉 디스크마냥 여기저기 던지면서 갖고 놀았다.
이쯤 되면 이벤트가 아니라 폭동이 아닐까?
실제로 이 사건을 다룬 위키는 이 사건이
"폭동(riot)으로 이어졌다"라고 서술한다.

이 글을 보던 당신이 슬슬
"않이, 도대체 시큐리티는 뭐했대요??"
라고 할 차례일텐데,
당시 시큐리티는 바깥에서 경기장으로 몰래 잠입하려는 닌자들을 막는데 정신이 나가있었다.

당시 수용 가능 인원 : 45,000
Bill이 예상했던 인원 : 20,000
보안팀의 통제 가능 인원 : 35,000
몰려든 인원 : 50,000(추정)

당시의 시큐리티 인원은 기껏해야 3.5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배치되었던 인력이었기에 손이 남아나질 않았던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결국 예정되었던 두 번째 게임은 취소되었다.
폭도(?)들은 무장한 경찰들이 제압했으니 안심하라구!
 

당연히 이 사건은 뉴스에도 났고, 온갖 비난에 휩싸였다.
제목 보임? 
"Sox Promotion ends in a mob scene"
"Sox의 프로모션이 폭력사태를 초래하다"
(Sox sxxks promotion이 아닌게 어디여...)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당시에 활활 탄 앨범들은 주로 디스코였지만
아프리카계 흑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장르들(Soul, R&B 등) 역시
인종차별적이고 또라이같았던 이 사건에서 안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시기에 테크노, 하우스, 그라임 같은 장르가 있었다면 얘들도 바로 화형당했겠지.

아무튼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후 디스코는 여러 시대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히 백인 또라이와 그에 선동된 모지리들의 열폭으로 끝나지만은 않았다.
이제 여러분들이 궁금해할 만한 의문 몇 가지만 정리해보자.

 

1. 디스코 이후의 장르는 어떻게 되었나?

이 사건 이후 디스코가 몰락하면서, 디스코를 대체할 새로운 장르들이 필요해졌다.
디스코에 대한 반발(Backlash)가 이렇게 큰데, 디스코 앨범을 냈다가 우리 본사가 탈 지 누가암?

그러자 시카고에서 디스코 DJ로 활동하던 Frankie Knuckles가 House의 초석을 쌓고...
뉴욕에서는 Garage가 탄생했고...
디트로이트에서는 Techno가 탄생했고...

사람들은 누구보다 흑인 아티스트를 좋아하면서 왜 그 본심을 숨기는걸까?

결국 디스코는 다른 이름으로 재포장되어 더 승승장구했다.
생각해보니, 이후 EDM 씬을 강타한 음악 장르들이 모두 흑인들에 의해 탄생하게 된다.
특히 Frankie Knuckles가 '시카고''흑인 게이'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2. 사건에 대한 반응

사건 다음 날.
Steve Dahl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라디오를 진행하였다.
다만, 당일 아침 조간신문에 대문짝하게 실려있던 자신의 작품을 보고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

"(거사의) 대부분은 좋았다.
몇몇 사람들이 과격해져서 필드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러지는 말았어야지.
에잉 나쁜넘들"

이 양반은 이 사건으로 지역 법원에도 출두하였는데,
이후에도 종종 과격한 발언 등이 지적 되어 끝끝내 WLUP에서 해고당했다.

이와 무관하게, Steve Dahl은 여전히 자신의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 팟캐스트도 진행한다.
소문에 의하면 가끔 코미스키 파크에서 시구를 한다고 한다.

당시 상대편 Tigers의 매니저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남겼다 :
"야구 보면서 맥주 마신다고 누가 머라하든?
근데 저 놈들은 맥주가 아니라 약을 한게 분명하다ㅇㅇ"

아직 약을 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없기는 한데(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나 같아도 의심해볼만 하겠다.

그렇다면 구단주 Bill과 아들 Mike는 어떻게 되었을까?
Bill은 여론의 몰매를 맞으며, 머지 않아 팀을 팔고 야구계에서 영영 떠나야만 했다.
모지리들, 정말로 필드 한 가운데에서 폭탄 터뜨리면 매장당할지 몰랐던것일까?

대답은 Bill의 아들 Mike의 회상으로 대신하겠다 :
"어떤 놈이 필드로 뛰어들 때, 딱 깨달았지. ㅈ됐네"

3. 경기 결과

당일 치뤄졌던 제 1경기에서는
White Sox가 Tigers에게 1-4로 완패당했다.
 
저런.

사건 이후의 경기에 대해서는, 당시 MLB 협회장이
White Sox가 Tigers에게 0-9로 몰수패 당한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병신들...

마지막으로, 야구 평론가 Jeremiah Graves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오늘날 Disco Demolition Night는 가장 안좋았던 프로모션으로 꼽히지만,
지난 30년간 우리가 계속 기억하는 것을 보면 가장 성공한 프로모션이기도 하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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